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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때 사라진 ‘칠성단’ 원형 찾았다(한라일보)

일제때 사라진 ‘칠성단’ 원형 찾았다

제주성안 북두칠성 형태로 설치됐던 유적
1926년 ‘매일신보’에 기사· 사진 함께 보도

입력날짜 : 2010. 12.15. 00:00:00

제주성안에 북두칠성의 형태로 일곱군데에 세워졌던 칠성단( 七星壇; '七星坮', '七星圖')이 1920년대 후반까지 존재했음을 뒷바침하는 기록과 사진이 새로 발굴됐다. 이에 따라 학계와 문화재당국의 위치 파악과 발굴·복원 등 새로운 조명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는 김순택 세종의원 원장이 입수, 소장하고 있다.

1926년 당시 서울에서 발행되었던 매일신보는 5월 11일자에 '제주시민의 철시성복(撤市成服)/ 비장한 봉도식(奉悼式)' 제하의 기사와 함께 관련 사진을 싣고 있다. 매일신보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 황제가 승하하자 전국의 애도소식과 더불어 제주도((島)의 내용을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다. 보도 내용을 보면 제주도에서는 이달 5일 시민일동이 이곳 갑자의숙( 甲子義塾) 뒤편 칠성단(七星壇)에 운집하여 고(故) 이왕전하(李王殿下) 승하( 昇遐)에 대해 소복으로 차려입고 근엄하게 봉도식(奉悼式)을 봉행한 소식을 사진을 겯들여 '제주발'로 다루고 있다.

매일신보는 또 같은 해 6월 14일자에 제주발로 망곡식(望哭式) 후속기사를 내보내고 있다. 즉 순종황제의 인산(因山)일을 맞아 제주도내 각 관공서 등에서는 일제히 조기를 게양, 관민 유지 및 각 단체 대표들이 오전 11시 제주도청(濟州島廳) 후정(後庭)에서 망곡식을 거행했고, 청년단체와 시민들도 같은 날 오후 갑자의숙(甲子義塾) 후원에 봉결단을 차리고 추도행사를 가졌다는 내용이다.

이들 기사와 사진을 볼 때 제주읍내 갑자의숙 뒤편에 칠성단이 있었고, 칠성단은 나라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시민들이 모여 함께 기념했던 곳임을 뒷바침하고 있다. 또 사진자료를 보면 칠성단의 형태는 평지보다 2~3m 정도 높고, 면적은 10여평 남짓하며 둘레 30~40m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향토사학자인 김찬흡 선생은 칠성단 앞쪽에 있었던 갑자의숙에 대해 "1924년(갑자년) 당시 '탕건할망'으로 불리는 양(梁)씨 할머니가 오현단 북쪽의 땅을 내놓아 설립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또 "갑자의숙은 개량서당의 하나로 제주도사(濟州島司)의 인가를 받으면 쉽게 설립이 가능했는데, 갑자의숙에는 공립학교인 제주북교에 편입하지 못한 남녀학생을 수용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강문규 기자 shkim@hallailbo.co.kr

  

해설 / 칠성단 자료발굴 의미]제주역사의 정신적 구심체
1920년대까지 존재한 것으로 확인
'경술국치 100년' 복원 재조명 시급


입력날짜 : 2010. 12.15. 00:00:00


▲'제주시민의 철시성복(撤市成服)/ 비장한 봉도식(奉悼式)' 제하의 기사와 함께 관련 사진을 싣고 있는 1926년 당시 서울에서 발행됐던 매일신보 5월 11일자.

이번에 본지가 발굴한 칠성단(칠성대 또는 칠성도라고도 부른다) 자료는 제주향토사의 중요한 유적을 재조명하는데 있어 매우 소중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칠성단에 관한 기록은 조선조 초기부터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제주목 고적조(古蹟條)에 따르면 "칠성도(七星圖)는 제주성안에 있는데, 돌로 쌓았던 옛터가 남아 있다. 삼성(三姓)이 처음 나와서 삼도(三都)를 나누어 차지하고 북두성 모양으로 대(臺)를 쌓아 나누어 웅거하였다. 그 때문에 칠성도라고 이름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또 김정 목사(金 정(人+政); 1736. 영조 12))는 그의 노봉문집에 '월대(월대(月臺)와 칠성도(七星圖)를 수축(修築)하고'라는 제목으로 "월대는 관덕정 뒤에 있고 칠성도는 성안에 흩어져 있는데 모두 돌을 쌓거나 흙을 쌓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무너져 남아 있지 않아 겨우 그 터를 알 수 있을 뿐이기에 수축하도록 명하였다"고 기록했다. 이어 시를 지었는데 "옛 도읍의 유적 날로 황량한데/ 근처에 사는 사람들 모두 헐어무너뜨렸네/ 평평한 언덕처럼 마구 다녀 한 번 이치를 밝히니/ 성 안 가득 별과 달 다시 뜨네"라는 시를 남겼다. 칠성대와 월대를 복원함으로써 성 안 가득 달과 별이 떴다고 표현한 것이다.

칠성대는 언제 설치되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다. 다만 만농 고(故) 홍정표선생은 '탐라성주유사'에서 통일신라시대인 신라 성시(盛時)에 탐라가 신라에 입조한 뒤 삼을라 세 부족의 결속과 나라(耽羅)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해 북두칠성에 대한 봉제의 제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동안 칠성대에 관한 연구는 일부 향토사가들에 의해 한, 두편의 논문이 발표되었으나 학계에서는 다루지 않고 있다. 칠성대가 언제까지 존재했고, 어떤 형태로 쌓았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민간신앙과 결부시켜 해석하려는 경향도 있다. 그런데 기자는 1992년 일도동 구장을 수십년 역임한 고(故) 송천택 옹(당시 77세)로부터 칠성단이 193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으며 명절 때와 같은 중요한 때는 칠성단 앞에서 제를 지냈다는 증언을 청취, 이를 '돌과 바람의 문화'에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칠성대를 쌓은 탐라선인들의 지혜를 제주발전의 정신적 구심체로 삼을 것을 칼럼을 통해 강조한바 있다.

우근민 도지사는 선거공약으로 '칠성대 복원'을 제시함으로써 칠성대에 관한 조명과 복원작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20년대 후반 칠성대의 형태와 위치, 기능에 관한 내용을 보여주는 사진과 글이 발굴된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더구나 1926년 당시 갑자의숙의 위치는 지금의 제주시 중앙로터리 동남쪽에 위치한 생깃골(校洞) 일대로 관음사 포교원 주변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옛 향교가 있었던 데서 지명이 유래한 교동(校洞) 일대로 고(故) 홍순만선생도 교동(생깃골, 생교골)에 별자리(칠성단) 하나가 위치해 있었다는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칠성대는 탐라국의 시작과 번영의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가장 오래고 중요한 유적이다. 더구나 이 유적은 1930년대까지 존재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유적임이 이번에 확실히 밝혀졌다. 탐라문화권의 복원과 일제의 잔재를 청산한다는 차원에서도 '경술국치 100년'이 되는 해에 발굴된 칠성대 자료의 의미는 매우 소중하다.

/강문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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