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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예산 추사 고택(제민일보 기사)


추사 유적, 권력의 무상함이 있는 영욕(榮辱)의 풍경
<위크앤팡>미술과 문화<김유정의 '미술로 보는 세상'>추사 김정희 유적

예산에서 태어나 남쪽 변방 대정현에 유배 와 학문을 완성세월을 넘어 추사의 삶과 죽음을 함께 볼 수 있는 추사유적

▲사진1 ; 추사가 탄생한 추사고택
팔봉산 한 줄기를 따라 형성된 충남 예산의 용산(龍山)자락에 단아하게 단장한 추사 고택(古宅)이 서 있다.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정갈하기가 그만인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이며, 영조대왕의 부마(駙馬)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1720~1758)에 53칸 규모로 지었다고 전해온다.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은 13세때 영조(英祖)의 장녀 화순옹주(和順翁主)와 결혼하여, 왕가의 혜택을 크게 받은 인물이다. 시호(諡號)는 정효공(貞孝公), 벼슬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莩摠管)과 왕에게 진상하는 각종 천, 인삼 등 물건과 왕이 개별적으로 관리들에게 주는 의복, 비단, 무명, 물감 등을 맡아보는 정2품 벼슬인 제용감제조(濟用監提調)였다. 월성위는 시문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월성위는 추사의 증조부(曾祖父)로서 이때부터 추사집안을 흔히 월성김문(月城金門)이라고 불렀다. 
영조는 예산군 신암면(新岩面) 일대를 월성위가(月城尉家)에 별사전(別賜田)으로 내리고 해당(該當) 도(道)에 왕명으로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협력하여 집을 짓게 하니 충청도 53군현(郡縣)이 각 한 칸(一間)씩 분담해 건립함으로써 53칸의 집이 되었다고 한다. 양반 대갓집 풍모를 갖춘 추사고택은 잦은 병란으로 화를 입어 지금은 34칸만이 남아 있다.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이 고택에서 김한신의 손자가 되는 아버지 유당공(酉堂公)  김노경(金魯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杞溪 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당공은 3자를 두었는데 장남이 정희(正喜), 차남 명희(明喜), 3남이 상희(相喜)이다.
추사의 고택은 안채 6칸 대청, 2칸통의 안방과 건넌방이 있으며, 부엌,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고루 갖춘 □자형 기와집이다. 안방과 건넌방에는 각각의 툇마루가 있고, 부엌 찬장은 다락으로 되어 있다. 또 사랑채는 ㄱ자형의 남향집인데 남쪽에 한 칸,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대청과 마루로 되어 있다. 댓돌 앞에는 석년(石年)이라고 음각으로 새겨진 돌기둥이 있는데 이 돌기둥은 추사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했다고 한다. 안채와 사랑채의 기단은 길게 다듬은 돌로 반듯하게 자리하고 사각의 주축돌을 놓았다. 퇴보와 대들보가 같은 높이에 있고,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사랑채의 함실 부분에는 지형의 경사가 심하게 맞배지붕으로 층을 이루게 하였다.(예산군, 2008)
▲기둥에는 주련(柱聯)이 있어 추사 집안의 품격을 드러내준다.   그림 그리는 법은 장강 만리와 같은 유장함이 있고, 글씨 쓰는 법은 외로운 소나무 한 가지와 같다(畵法有長江萬里, 書藝如孤松一枝).옛 것을 좋아해 때때로 끼어진 비석을 찾고, 경서 연구에 며칠 동안 시를 읊지 못했네( 好古有時搜斷碣, 硏經婁日罷吟詩)봄바람처럼 큰 아량은 만물을 용납하고, 가을 물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다(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솔바람에 풀어진 옷고름을 날리고, 산 위에 뜬 달은 타는 거문고를 비춘다(松風吹解帶, 山月照彈琴) 김정희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子)는 원춘(元春),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갑파(甲波)·노과(老果)·백양(伯養)·현란(玄蘭)·승련노인(勝連老人) 등 평생 200여개의 호를 사용했다.
추사는 24개월 만에 태어났다는 잉태의 전설과 추사가 태어날 때는 후정(後井)의 물이 줄어들고, 팔봉산(八峯山)의 수목(樹木)이 모두 시들었다는 정기설(精氣說)이 있을 정도로 날 때부터 특출한 인물로 알려졌다. 어릴 때부터 성격이 온화하여 교우(交友)를 잘 사귀었으며 박학다식하였다. 북학(北學)의 대학자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는 6세 때 추사의 <입춘첩(立春帖)을 보고 "이 아이가 크면 장차 내가 가르치고 싶다"고 할 정도였다. 7세 때에도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대문에 붙은 추사의 입춘첩을 보고 '명필로 이름 날리리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같은 해 추사는 당시 형조참판이었던 큰 아버지 김노영(金魯永)의 양자가 되었다. 추사는 사물을 보고 흥미를 느낀 것에 대해서는 모두 자신의 아호로 쓸 정도였다고 전해온다. 15세에 추사는 한산이씨(閑山李氏)를 맞아 혼인을 하였으나, 한산이씨가 2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23세에 이르러 예안 이씨(禮安 李氏)를 재취(再娶)로 맞아들였고, 대정현 유배시 예안 이씨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추사의 유년기인 18세기 말엽은 봉건사회가 해체되는 시기로서 조선사회 전반적으로 위기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신·구사상과 세대간의 갈등을 보듬고 정치적 조절에 힘을 기울였던 정조가 사망하자 세도 정국은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당시 추사의 경주 김씨 집안은 안동 김씨, 풍양 조씨와 함께 세도가의 문벌을 형성하고 있었고, 바로 이런 배경으로 인해 추사는 일파만파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고, 동시에 정치적 좌절을 겪기도 했다. 그는 약관(弱冠) 때부터 경서(經書)를 두루 섭렵하여 아는 지식이 하해(河海)와 같을 정도였다고 한다.
추사는 1800년 (순조 9년) 24세에 생원시에 일등으로 급제하였고 같은 해 호조참판이었던 친부(親父) 김노경(金魯敬)이 동지겸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가 돼 연경(燕京)에 갈 적에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 동행 할 수 있었다. 그 때 추사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완원(阮元, 44세)과 당시 77세 고령이었던 옹방강(翁方綱)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31세 때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발견하여 고증하였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38세에 정9품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는데 세자를 가르치는 정7품 벼슬의 '설서(設書)'를 겸직하였다. 같은 해 규장각 대교(待敎)로 임명된 후 41세에 충청우도 암행어사, 42세에 예조참의(禮曺參議), 50세에 좌부승지(左副承旨), 54세에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벼슬길을  승승장구하던 추사도 이후에 있을 인생의 먹구름을 전혀 예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진2 ; 추사고택 옆 옛 석물도 없이 단촐한 추사의 무덤
  
▲추사 김정희 묘와 화순옹주 홍문
1840년 55세가 되던 해 추사는 윤상도 옥사사건에 휘말려 모진 고문 끝에 사형을 선고 받았지만, 젊어서 같은 해에 문과에 같이 합격한 우의정 조인영(趙寅永,1782~1850)의 탄원 덕에 목숨만을 겨우 건지고 같은 해 9월 2일 대정현으로 위리안치(圍離安置)하라는 왕명이 있었다. 제주도 남쪽 끝 대정현에서 탱자나무 울타리를 두른 채 8년 3개월이라는 죄인 생활을 했다. 풍토가 다른 곳에 갇힌 몸은 괴로웠지만 학문적으로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기간이었다. 추사는 대정의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렸고,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 추사체는 어쩌면 겨울 바닷바람을 맞은 제주도 팽나무의 꿈틀대는 선과 흡사하다. 강한 바람 때문에 제주도 나무들은 딱딱하고 몸을 이리저리 휘며 조건에 맞게 살기 위해 구부린다. 나무들이 바람을 넘기기 위해 생존을 벌이는 모습이 역력하다. 그 모습은 투박하지만 강인한 생존의 힘을 느끼게 한다. 생명의 힘은 생존의 힘과 다르지 않기에 유배지의 추사의 심정이 그랬을 것이다. 1848년 12월 6일 제주도 유배가 풀려 서울 용산으로 돌아온 추사는 그것이 마지막 유배인줄 알았다.
그러나 3년 뒤 서울에서 조용히 지내던 추사는 다시 정치적 사건에 휘말렸다. 철종의 왕통(王統)을 둘러싼 전례 논쟁인 '진종조례론(眞宗?禮論)'-진종(眞宗)은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로서 정조가 그 양자가 되어 추존한 이름-에서 안동 김씨 일문은 산림학자 홍직필(洪直弼)까지 동원하여 조천(?遷) 불가(不可)를 주장하는 영의정 권돈인(權敦仁, 1783~1859)의 예론을 공격하였고, 치열한 논란 끝에 결국 진종을 조천하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이에 예를 잘못 거론한 책임을 물어 영의정 권돈인은 낭천으로 유배되었고, 그 배후로 지목된 추사는 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유봉학, 2002). 추사는 북청 유배시 세상의 무상함을 느꼈는지 어느 때보다도 의연히 자신이 보던 책을 반듯하게 정리하고 홀연히 길을 떠났다고 한다. 북청에서 1년의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추사는 벼슬길의 무상함을 느끼고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과천(果川)에서 세월을 보내다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세도가의 가문에 태어나 영욕(榮辱)의 한가운데서 파란만장 일생을 살다간 추사의 무덤은 추사고택에서 200m도 채 안된 가까운 거리에 조성돼 있다. 종2품 형조참판의 벼슬에 걸맞지 않게 옛 석물도 없이 소박하다. 무덤을 보호하는 사성(莎城)에 금잔디만 무성하고, 옛 석물들은 일찍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현대판 오석의 묘갈과 망주석이 권력의 무상함을 감추려는 듯 덩그마니 세워져 있다. 묘역은 넓게 2단으로 조성돼 있고, 무덤 앞에 한 뿌리에서 두 몸이 나와 Y모양이 된 노송이 추사의 굴곡진 삶을 대변하듯 말없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어있다.
추사고택 오른쪽 가까운 곳에 월성위(月城尉)와 화순옹주의 합장묘가 있고, 그 옆에 추사의 증조모(曾祖母)가 되는 영조(英祖)의 장녀 화순옹주(和順翁主)의 홍문(紅門)이 있다. 화순옹주는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부군(夫君)에 대한 애도의 정에 못 이겨 식음을 전폐하다 부군의 뒤를 따르니, 영조는 부군을 따른 옹주의 정절은 귀히 여겼으나 자신의 뜻을 몰라준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은 내리지는 않았다. 후에 정조가 즉위하자 200여 평의 대지 위에 담장을 두르고 정면에 붉은 색을 칠한 정문(旌門)인 '홍문(紅門)'을 세웠다.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 중앙의 오른쪽 칸에 문을 내었다. 문의 정면에 홍살을 세우고 지붕을 씌운 후 처마에 붉은 색을 칠한 현판을 걸었다. 현판에는 열녀문임을 표하는 흰 글씨가 세월을 넘어 슬픔의 자국처럼 또렷하다. 미술평론가
(제민일보 2010년 8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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