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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족의 제주 유배(제민일보)



▲ 사진1 ; 제주의 여인들은 강하다. 옛 제주의 여인들은 생계를 위해 바다와 씨름해야 했다. 유배인 이건의 '제주풍토기'는 잠녀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는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의 또 다른 기억 유배문화, 그것의 산업적 가치
(6) 왕족의 유배


조선조 제16대 임금 인조는 무력 정변을 일으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다. 광해군 때(1616~1619년) 제주목사를 지낸 바 있는 이괄은 반란군의 임시대장을 잠시 맡으며 인조반정에 앞장섰다. 인조 2년(1624년) 이괄은 난을 일으켜 왕권에 도전, 선조의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옹립하지만 곧 평정된다. 이괄의 난은 실패로 끝이 난다. 인조의 왕위에 대한 불안은 숙부인 인성군,  왕족인 이덕인을 유배 보낸 후 사약을 내려 스스로 죽게 한다. 맏아들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세자빈에겐 사약은 내리고 세 손자는 제주로 유배 보낸다.

△'제주풍토기'를 쓴 이건
이괄의 난과 연관돼 선조의 일곱번째 아들이자 인조의 숙부인 인성군(이공)은  강원도 간성에 유배된다. 원주로 이배됐다가 풀려나지만 다시 1628년 유효립 등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며 가족과 함께 진도로 유배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당시 인성군의 유배지는 제주 정의현이었지만 너무 멀다 하여 진도로 유배지가 바뀐다. 하지만 인성군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게 된다. 인성군의 아들 삼형제와 가족은 제주로 옮겨진다. 이배된 이유를 보면 진도는 협소하니 제주로 옮기면 살기가 편하도록 하기 위한 것으로 일종의 배려였다. 현재의 일도1동 인근에 배소(1628년 6월)를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성군의 아들 중에서 15세의 셋째 이건은 제주에 머무는 동안 당대 제주의 문화를 기록한 '제주풍토기'를 남겼다.
제주풍토기는 현재 흔하게 사용되는 해녀의 다른 용어인  '잠녀' 처음 등장하는 문헌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풍토기에는 잠녀는 미역을 캐는 여자를 말한다고 기록했다. 알몸으로 작업하며 이를 부끄러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쓴다. 이는 당시 유림의 눈에 비친 제주의 풍토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또 생복(전복)을 캐는 잠녀들에 대한 관원의 횡포를 기록, 제주 잠녀의 실상을 한양의 선비들에게 알리는 전파자 역할을 한다. 이와 함께 제주의 뱀 신앙, 신당, 동물, 농사법, 김만일의 말 사육 비법 등 17세기 제주를 생생히 담아냈다.
이건은  '가장 슬픈 것은 파도 소리다'라며 유배인으로서의 심경을 제주풍토기를 통해 토로하고 있다. 귤림서원에 배향됐던 오현 중 한명인 정온의 상소로 이건은 1635년 8월 제주에서 강원도 양양으로 이배된다.

△전주이씨 계성군파 제주 입도조 이팽형의 아버지 이덕인
통계청이 지난 2000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제주지역에 거주하는 전주이씨는 2만4818명(7571가구)인 것으로 조사됐다.
제주에 살고 있는 전주이씨 중 가장 큰 종파를 이루고 있는 계성군파의 제주입도조는 유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주이씨 계성군파 입도조는 이팽형이다. 이팽형의 아버지 이덕인(회은군)은 인조 22년(1644년) 심기원 등이 이덕인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발각돼 제주 대정현에 유배된다. 이덕인은 제9대 임금 성종의 16남 가운데 2자인 계성군의 증손이다.
인조가 신하들에 의해 임금으로 선택됐듯이 이덕인은 신기원 등에 의해 왕으로 선택됐지만 그해  제주에서 사약을 받아 생을 마감한다. 입도조 이팽형에 대한 기록은 제주인물사를 다룬 책자들과 전주이씨 족보가 서로 다르다.

▲사진2 ; 유배인 이덕인은 전주이씨 제주입도조 이팽형의 아버지다. 이팽형은 아들을 득춘 낳고 득춘은 13아들을 낳는다. 제주시 이호동에 위치한 득춘의 묘는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제주인물사를 다룬 대부분의 책자에서는 이팽형(1576년생)은 1596년 21세인 젊은 나이에 제주에 낙향, 두목골(현재의 제주시 이도1동 부근)에 정착해 임윤화의 딸을 맞아 아들 이득춘을 낳는다. 30세의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외아들이던 이득춘은 제주에서 아들 13명을 둬 자손이 번성하게 된다.
반면 전주이씨 계성군파 제주특별자치도 종친회는 입도조인 이팽형이 제주를 찾은 시기를 다르게 보고 있다.
종친회가 제시한 족보 등에 따르면 이팽형은 아버지가 제주로 유배된 1644년 이에 충격을 받아 아버지 이덕인을 돌보려 제주 두목골에 정착, 1665년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아들 이득춘을 얻고 이득춘이 아들 13명을 낳아 가계가 번창하게 된다.
이팽형의 묘는 제주시 이도2동 현재의 종친회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다호마을 인근으로 이장했다. 이득춘의 묘는 이호동 덕지답 인근에 안장돼 있다. 이득춘의 묻힌 곳은 명당자리로 알려져 있다. 묘소 인근에는 용천수가 쏟는 덕지물이 자리 잡고 있어 명당의 조건을 갖췄다고 종친회는 설명했다.

▲ 전주이씨 제주입도조 이팽형의 부친은 유배인 이덕인이다. 이팽형은 득춘을 낳고 득춘은 아들 열셋을 낳는다. 제주시 이호동에 위치한 득춘의 묘 앞에 흐르는 덕지물.


△소현세자의 세아들
인조는 1636년 병자호란에 패해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만다. 인조는 맏아들 소현세자와 세자빈, 봉림대군(훗날 효종)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청나라에서 9년 동안 인질로 잡혀 있던 소현세자는 1645년 귀국하지만 환영받지 못한다. 소현세자는 귀국 2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인조에 의한 독살이라는 설이 일부 학자들 사이에게 제기되고 있다. 세자빈 강씨는 이듬해(1646년)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죄명으로 사약을 받는다.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가 악화된 데에는 인조의 총애를 받은 후궁 귀인 조씨의 이간질이 작용했다는 일설이 전해진다. 귀인 조씨는 인조와의 사이에서 2남 1녀를 뒀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 이석철(당시 12세), 이석린(당시 8세), 이석견(당시 4세)이 제주에 유배된다. 이들이 제주에 유배되자 제주, 정의, 대정 세 고을에 정배된 사대부들은 왕의 명령에 따라 유배지를 다른 섬으로 옮겨야 했다. 이 때 홍무적이 남해현으로, 신득연이 진도군으로 이배됐다.
하지만 석철과 석린이 풍토병을 죽는다. 손자 둘을 잃자 인조는 이들을 돌봤던 옥진, 애영, 이생을 잡아 문초한다. 옥진은 정강이를 때리는 형벌인 형신을 받다가 죽고 애영과 이생은 형신을 받다가 석방된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자 세자의 장자인 이석철에게 세자의 뒤를 잇도록 하지 않고 아들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한다. 이는 향후 조선 왕조의 서인과 남인 사이의 예론정쟁의 불씨가 된다. 효종이 죽자 효종이 적장자가 아니기 때문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장렬왕후 조씨)가 3년복을 입어야 하는지, 1년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가 정쟁화 된 것이다. 이는 효종의 왕위 계승이 적법했는지를 따지는 민감한 사안이었다.(제민일보 2010년 9월 1일 글·사진=장공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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