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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리 현호진·현호경·현호옥 지사 생가 09-11 | VIEW :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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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성산읍 성산리 236번지. 진양슈퍼와 그 안집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항일투쟁가 생가

현호진(玄好珍. 1907∼1948) 지사는 본관은 연주이며 사업가 현승오의 장손이며 현길홍(1930년대 오사카-제주 간 일본 기선의 횡포에 맞서 ‘우리 배는 우리 손으로’라는 기치 아래 여객선을 띄웠던 동아통항조합의 조합장)의 장남이다. 성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우 현호경, 누이 현호옥과 3남매가 동포의 권익을 위하여 투쟁하였다.
현호진은 1930년 11월 전협(日本労働組合全国協議会)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책임자 조몽구의 소개로 전협에 가입하여 화학 플렉션(정당이 대중 단체의 내부에 조직하는 당원 조직)으로 효고(兵庫)현에서 조직 활동에 힘썼다. 전협은 일본공산당(당시 일본공산당은 조선의 독립을 주장함)의 외곽 조직이었으며, 한인으로서 이 노조에 가입한다는 것은 순수한 의미의 노조원이 아니라 조선 민족 해방을 중심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본인 극좌분자의 협력과 원조 아래 과감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4월에 전협 토건노조 오사카지구 준비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같은 해 9월 하순 강주호 등 다수가 검거되어 궤멸상태에 이르자 1934년 5월에 관서지방위원회 오사카시위원회를 재건하였다. 이 때의 조직은 일본공산당 내의 분파 가운데에서 검거를 모면한 잔류자들이 그 주요 세력이 되었다.
현호진은 구좌면 하도 출신 운동가(고진호, 이영복, 김만선, 현상호)들과 함께 조직(나가야도모노까이=長屋友之會=셋방살이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어 집세 및 각종 요금 등의 인하, 면세 투쟁을 벌여 재일 조선인의 혁명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이들은 1934년 3월에 적기독자(赤旗讀者)그룹을 조직하여 그 인원을 확대해 나가던 중 1934년 6월 30일 검거·송치되었다. 현호진은 12월 20일 나라(奈良)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미서훈
현호경(玄好景. 1909∼1949) 지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나, 오사카에서 토목공사의 노동자로 1932년 9월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였고, 형과 함께 全協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가명으로 全泰蓮을 썼고, 일본식 이름은 마츠모도(松本), 오오다니(大谷), 야마다(山田)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며 지하운동에 임하였다. 특히 김문준의 영향을 받아 투쟁의 수위를 높였다. 1933년 공산당 오사카시 東지구 오르그로 시위원회의 책임자로 활동하다 1934년 4월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이 때 그는 적기(赤旗) 및 그밖의 문서의 살포에 종사하면서 3월에는 적기독자그룹을 조직하여 그 회원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1935년 1월 21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일제 말기 경방단  1937년에 효과적인 전시 동원 체제 구축과 대중 통제를 위해 조직한 소방 조직 단체를 이르던 말. 도지사와 경찰서장의 지도와 감독 아래에서 평시와 전시를 가리지 않고 방공, 소화, 수방, 기타 경방에 대비하는 임무를 담당하였고 경찰의 보조 기관 역할까지 수행하였다.
(警防團)에 접근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은 바 있으며, 광복 후 귀향하여 한 때 좌경활동을 하였다. 1947년 2월 23일 제주도민주주의민족전선 결성대회가 열렸을 때 인민항쟁에 쓰러진 투사들의 유가족 후원금과 눈앞에서 투쟁하는 현호경과 강성열에게 격려금과 의복 등을 보내기로 하였는데 성출된 금액이 3300여원에 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 후 그는 남로당 목포시당 책임자로 활동하다가 1949년 갑자기 암살당하였다. 미서훈
현호옥(1913~1986) 지사는 성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중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자전거 공장 여공으로 일했다. 오빠 현호경의 영향으로 1933년 2월 일본 노동조합전국협의회(전협) 화학노조 오사카지부 회원으로 가입해 동년 남해고무공장 여공으로 오사카지구 동북구 남해공장 분회원이 되었다. 1934년에는 전협 오사카지구 화학노조준비회 부인부장 및 東 지구 야츠이(安井) 고무공장반 부인부 책임자로 노동운동을 하였고, 오사카 히가시나리꾸(東城區) 방면에 산재한 고무공장의 한인 노동자를 중심으로 赤色스포츠단 단원 확보에 노력하는 한편 전협 일본화학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적색스포츠단의 준비회를 결성할 때에는 婦人部를 담당하였다.
1934년 메이데이에 비합법 행사를 감행할 계획을 준비하던 중에 당국에 체포되었다.   1935년 오사카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가파도 출신 남자와 혼인하여 하모리에서 거주하다 사망하였다.(제주항일인사실기) 2019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한겨레 2019-08-13)
《작성 19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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