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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귀2리 학원동 집단학살터 02-13 | VIEW :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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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애월읍 하귀2리 학원동민회관 터 및 그 동쪽 앞밭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학살터
개수동 비학동산 앞 밭에서는 1948년 12월 10일 경찰이 개수동 주민과 소개민들을 모아 놓고 그 중 36명을 학살했다. 개수동 비학동산의 학살 경위는 다음과 같다.
경찰은 1948년 12월 초 개수동 청년들에게 자수하라는 통보를 보냈다. 무슨 근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마을에 있던 청년 10명의 이름을 지목해 자수하면 무사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크게 당할 것이라는 통보였다. 이에 마을 청년들과 유지들이 모여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결론이 나지 않았다. 주민들은 경찰을 믿을 수 없었다. 며칠 전 장작사건으로 외도지서에 갔던 청년들도 실려가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지목된 청년 중 한 명인 김호중(20대 중반)이 "내가 일단 출두하겠다. 내가 무사하면 경찰의 약속이 증명되는 것이니 그 때 자수하라"며 홀로 외도지서로 갔다. 그 후의 상황에 대해서 고창선(남, 03년 69세)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김호중 씨 부인이 나에게 말했어요. ‘남편이 지서로 갔더니 경찰이 다른 사람들도 설득해서 데리고 와라. 그렇지 못하면 너만이라도 오라고 했다’고 말이죠. 김호중은 결국 아무도 못 데리고 혼자만 지서로 가야 했어요. 그런 김호중을 경찰은 12월 7일 총살하고 개수동에 대한 소탕령을 내렸죠.
그 날(12월 10일) 아침 개수동 사람들을 죽일 것이니 미리 대처하라는 연락을 받긴 받았어요. 그러나 우물쭈물 하는 사이 군인과 경찰이 합동으로 아침 9시경에 마을을 포위하고 들어왔죠. 토벌대는 비학동산에 사람들을 다 모아 놓고 우선 도피자 가족들 전부 나오라고 했어요. 이때 김호중은 이미 죽었는데 73세 된 그 부친은 아들이 없으니까 나갔죠. 이런 경우에는 토벌대에서도 전후 사정을 알아보고 해야 하는데 무조건 쏘아 버렸어요. 어느 누구라도 그 분은 아들이 먼저 죽었다고 말을 해주었다면 살았을 건데….
이날 도피자 가족 집들은 다 불태워졌고, 소개민을 포함해 36명(개수동 출신 31명)이 총살당했어요. 토벌대는 10시경부터 선별한 주민들을 앞밭으로 몰아넣고 총살한 후 1시경에는 집들을 불태웠죠. 그 때 사람들을 죽인 장소가 현재 동민회관 바로 앞밭이예요.”
이 날 주민들을 학살하기 전 토벌대는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을 저질렀다. 토벌대는 주민들이 비학동산에 모이자마자 먼저 한 여인을 끌어내어 옷을 전부 벗겼다. 배가 부른 임산부였다. 고정규 씨의 부인이었는데 남편이 없다는 것이 죄였다. 토벌대는 여인의 겨드랑이에 밧줄을 묶어 팽나무에 매달아 놓은 후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고 마구 찔렀다.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주민들이 차라리 총으로 쏠 것이지 하며 눈을 돌리자 경찰은 ‘잘 구경하라!’고 소리쳤다.

희생자 : 김낙준(여, 69), 김재봉(65), 고희전(65), 고영삼(62), 고두주(60대), 백용흥(여, 60대), 현귀덕(여, 60대), 강화순(여, 61), 강승학(50대), 김지수(50대), 강기유(49), 고정규의 아내(30, 임산부), 김계생(여, 29), 강두중(16) 등

개수동 비학동산에 있던 팽나무는 그 후 마을 주민들이 베어버렸다. 임산부 학살 얘기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순례행렬이 잇따르자, 주민들이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떠올리기 싫어 베어버렸던 것이다. 현재 그 자리에는 마을회관이 들어서 있다. 한편 비학동산 앞밭은 당시 그대로 남아 농경지로 이용되고 있다.(http://www.jeju43.org/제주4․3연구소)
《작성 2020-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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