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 
하도리 부춘화 지사 거주지 03-21 | VIEW : 95
크기변환_하도리_부춘화지사집(1909)2.jpg(554.6 KB), Down : 0


주소 ; 구좌읍 하도리 1411번지(문주란로 26)
시대 ; 일제가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
부춘화(1908∼1995) 지사는 혁우동맹 산하 하도강습소 1기 졸업생으로 일제의 생존권 수탈에 맞서 항일운동을 일으킨 해녀이다. 제주 해녀항일투쟁은 국내 최대 여성 주도 항일투쟁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고 또한 성공적이었다.
부춘화 지사는 1908년 전라남도 제주도(濟州島) 구좌면 하도리 1411번지에서 출생하여 1922년 15세 때부터 해녀생활을 시작했으며 1927년부터 1931년까지 하도리야학소에서 세화리 출신 부대현 선생과 하도리 출신 김순종·오문규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928년 21살 되던 해에 제주도 해녀조합 산하 조직인 구좌면 해녀조합 대표로 선임되어 해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제주해녀항쟁 당시 해녀 대표로 구좌 지역 해녀들의 권익 향상과 생존권 투쟁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해녀조합 서기와 일본인 상인들이 짜고 무게를 속이거나 가격을 후려쳐서 헐값에 매수하기 일쑤였다. 연약한 제주해녀들을 얕보고 깔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해녀조합이 있었지만 일본인 도사가 조합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해녀를 위하는 조합이 아니라 해녀를 착취하기 위한 조합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어용 해녀조합은 물질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나 할머니들한테도 조합비를 받아갔고, 여기에다가 입어료, 소개비를 다 떼이고 나면 해녀 몫은 20퍼센트도 되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러는 상황에서 1930년 성산포에서 우뭇가사리 부정판매 사건이 발생했다. 경매를 통해 우뭇가사리가 근당 20전에 낙찰되었는데 조합 서기가 상인들과 결탁하여 18전으로 내려 버렸던 것이다. 이는 당시 시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었다. 이에 격분하여 현재성 등이 항의하러 갔다가 오히려 29일간 체포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발생했다.
1931년 5월에는 하도리 해녀들이 수확한 감태와 전복 값을 터무니없이 강제로 싸게 매기려 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해녀조합이 생복과 감탯재 판매에 있어 지정상인이 지정가격 내리거나, 지정등급을 변경하였기 때문에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에 해녀들은 항의하였으나 시정되지 않자, 1931년 6월부터 직접 투쟁에 들어갔다. 하도리 해녀들이 중심이 되어 자생적 해녀회를 조직하고 일제에 항거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제주해녀에 대한 착취에 항거하는 해녀항쟁을 일으켜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항거한 것이다. 1931년부터 시작하여 다음해 봄까지 연인원 17,000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집회와 시위 횟수 면에서도 238회나 계속되었다.
부춘화·김옥련·부덕량·고차동·김계석 등은 1932년 1월 7일 구좌면의 6개 마을에 거주하던 1,000여 명의 해녀들은 하도리에서 세화리 장터까지 시위를 하며 해녀조합의 부당한 처사에 항의했다. 그러나 이들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1월 12일 세화리 5일장날에 김옥련·부덕량과 함께 하도리·종달리·세화리·연평리(우도)·시흥리·오조리 등지의 해녀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연두순시하는 다구찌(田口) 제주도사의 차를 포위하고 구호를 외치며 해녀들의 요구사항을 낭독하는 한편, 해녀의 권익옹호와 자주성 회복을 외치면서 항일시위를 전개했다.
“우리를 착취하는 일본 상인들을 몰아내라.”
“해녀조합은 해녀의 권익을 옹호하라.”
해녀들은 자기들의 정당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항의를 주도한 해녀들이 구속되자, 구속자들을 호송하려는 자동차를 습격하면서까지 격렬하게 저항했다. 이에 놀란 왜경은 더 이상 해녀항일투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목포응원경찰대를 동원, 1932년 1월 26일 사건 연루자 20여 명을 검거하자 해녀대표인 부춘화는 해녀를 다시 동원, 검속 경관대와 무장 경관대에 격렬히 항쟁했다.
제주 해녀들의 대규모 집단시위에 당황한 일본 순사들은 총칼로 진압을 했고, 1월 24일에는 야학교사 청년들을 잡아가 해녀들을 의식화한 주범으로 몰아갔다. 이 소식을 들은 해녀들은 다시 1월 26일에 500여 명이나 모여들어 세화리 파출소를 습격하여 건물을 박살내 버렸다.
이 때 부춘화 여사 등 해녀 20여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물고문 등 갖은 고문을 다 당했다. 일경에 체포된 부춘화 여사는 해녀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은 내가 단독으로 주도했다’며 혼자 죄를 뒤집어썼다. 그리고는 온갖 고문을 참아내며 2년 6개월이란 긴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이러한 항일투쟁의 주인공들이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인 제주 해녀들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더 크다고 할 수 있으며, 먹고 살기 위해 거친 파도와 싸우기도 했지만 악랄한 착취를 일삼는 일제의 주구들과도 싸워야 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부춘화 지사는 2003년에 건국훈장을 추서받았으며, 2019년 1월 제주도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부춘화 지사의 집은 현재 슬레이트집으로 개량되어 생가의 원형은 달라졌지만 제주 전통 민가의 공간구조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작성 2020-03-21》
 PREV :   하귀2리 가문동 큰물(용천수)
 NEXT :   평대리 구좌면사무소 터
 LIST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