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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2동 고사훈(의병장) 생가 터 05-01 | VIEW :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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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이도2동 1133번지(현재는 이도2동 1133-1에서 1133-13번지까지 분할되어 있으며, 여러 채의 집들로 변해 생가 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시대 : 대한제국시대
유형 ; 위인선현유적

이곳은 1909년 2월 제주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고사훈(高仕訓, 1871-1909)이 태어난 곳이다. 제주의병의 의병장이었던 고사훈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1133번지에서 제주가 본관인 고영길(高永吉)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경지(景志), 호는 초광(樵㹰), 초명은 고구훈(高龜訓)이다. 의병장이 되면서 고승천(高承天)으로도 불렀다. 생가 위치는 『暴徒에 관한 篇冊』중「濟警秘發제36호의 3」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유족 고경호의 제적등본에 기재된 본적을 근거로 위치를 비정하였다.(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고사훈은 나이 30살에 이르러서야 소백(小柏) 안달삼(安達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경서와 시문에 능하였다. 한학에 열중하고 북학을 배워 이용후생을 실천하려 하였다. 고종42년(1905)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육지에서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신돌석(申乭石)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을 결의하고 거사 계획을 협의하였다.
순종2년(1908) 제주경찰서 서장에 임명된 통감부의 경부 시미즈[淸水重滿]는 많은 일본 경찰을 대동하고 부임하여 대정·정의·서귀포 등지에 경찰관분파소를 설치하고 제주도민을 위협하였다.
1908년 7월 당시 제주군수인 윤원구에게서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전해 듣고 본격적인 의병운동의 뜻을 품게 된다. 김석윤(金錫允)·노상옥(盧尙玉)과 함께 전라남도 장성(長城) 출신 의병장인 기우만(奇宇萬)·기삼연(奇參衍)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의병운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무기를 비밀리에 제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고사훈은 서당 숙장(塾長)이었던 김석익(金錫翼)과 고성모(高聖模)를 의병장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순종3년(1909) 2월 25일 고사훈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 조인관(趙仁官)의 집에서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구체적인 회합을 도모하였다. 당시 제주의병의 창의자는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거주하는 고사훈·이중심(李中心)·김석윤·노상옥·김재돌(金詛)·양남석(梁南錫)·김만석(金萬石)과 제주군 신우면 어음리에 거주하는 한영근(韓永根) 등 총 10명이었다. 창의자들은 회합에서 거사일을 1909년 3월 3일, 거사 장소를 관덕정으로 결정하고 의병장에 고사훈과 이중심을 추대하였다.
그리고 창의 당일 고사훈·김만석(金萬石) 등은 대정군으로 가서 모병을 시작하고, 김석윤·양만평(梁萬平) 등은 의병을 모았다가 고사훈이 거사하는 것을 기다려 가담할 것을 계획하였다. 한편 김석윤(金錫允)·노상옥(盧尙王) 등은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대장간을 차려 놓고 무기를 제조하였다. 그리고 화북리 황사평에서는 의병들을 모아놓고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1909년 3월 3일에 제주성을 점령하기로 정하고 격문과 통문을 살포하고 병력을 동원하기 위하여 고사훈이 대정군으로 출발하였다. 고사훈·조인관·김만석·김재돌·양남석 등은 1909년 3월 3일 영락리에 이르러 영락리에서 100여 명, 신평리에서 100여 명, 또 광청과 대정성의 북문 밖 마을에서 수십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장정 3백여 명을 가담시켰다.
의병대는 일본 경찰 대정주재소의 예측과 달리 대정성을 습격하지 않고 2월 28일 대정군의 중면 광평리에 집결하였다. 그러나 3월 1일 이른 아침 일본경찰이 의병대를 급습하였는데 이때 대정군수였던 김종하(金鍾河)가 관군과 장정 30여 명을 동원하여 경찰과 협력하여 의병 활동을 진압하였다.
막강한 무력을 보유했던 경찰과 맞설 수 없었던 고사훈과 김만석은 체포되고 나머지 의병은 지휘부를 잃어 흩어지게 되었다. 1909년 3월 4일에 고사훈과 김만석은 총살되었고, 참모였던 김석윤은 동광양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중심·조인관·노상옥 등은 귀덕(歸德) 포구에서 육지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고사훈과 함께 뜻을 함께 하였던 심재(心齋) 김석익은 다음과 같이「억고초광경지(億高樵㹰景志)」라는 시를 읊어 당시의 마음을 토로하였다. “오직 공의 굳은 성품은 이 세상에 비할 자 없어, 추풍에 말 달려 저 강 건너고자 몇 번이던가, 몸은 죽었으나 장한 뜻만은 아직도 죽지 않아, 우리천 아래 물을 서로 맞부딪치게 하오(惟公性癖世無雙하니 驅馬秋風幾渡江고, 篤志壯心今不死니 牛梨泉下水相撞이라).”
1909년 제주 의병 운동은 비록 실질적인 전투에까지 이르기 전에 체포당하고 말았지만 제주도민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이후 제주인들이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했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77년 1월 제주시민의 이름으로 고사훈의 항일투쟁을 기리는 의병항쟁기념탑이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남쪽 기슭에 세워졌으며 의병들의 넋을 모시는 모충사(慕忠祠)가 건립되었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8월 15일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997년 2월 제주시에서는 고사훈이 당시 거주하였던 제주경찰서 뒤편 변전소 주변 삼거리에서 제주제일중학교까지의 도로 700여 미터를 승천로(承天路)라고 명명하였는데 이는 고사훈을 기리는 뜻에서 명명된 것이다. 2005년 10월22일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제주통사, 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항일인사실기, 제주도 독립운동사적지)
《작성 202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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