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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대리 이두일 지사 생가 터 07-01 | VIEW :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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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구좌읍 평대(坪岱)리 1720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터)

이두일(李斗一, 1914.06.17.∼2008.07.07.) 지사는 李洪琳의 아들로 태어나 1927년 3월 사립하도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제주공립농업학교로 진학하였다.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 학생 운동이 거세게 폭발해 1930년 한 해는 전국적으로 학생 운동이 파급됐다. 제주도에는 일제 당시 중등학교로는 제주공립농업학교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학교의 재학생들도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어수선했다.
1931년 3월 6일 졸업을 앞두고 제주농업학교(濟州農業學校)에서 일인 교장 스기사카(杉崎勝藏)가 졸업사정회에서 김원요(金源堯)는 퇴학 처분, 신창진(愼昌珍)·양두옥(梁斗玉)은 유급(留級)시켰다.
김원요는 평소 조선인 학생을 경멸하며 식민지 교육을 강제하는 데 불만을 나타내었으며 교내 행사에서 일본 왕의 칙어를 낭독할 때 학생이 묵념을 하게 되어 있는데도 이를 늘 거부하였고, 양두옥과 신창진은 일제의 황민화 교육과 민족적 차별 교육에 대해 저항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일제는 칙어불경사건이라고 했다.
3월 7일 졸업식이 끝나자 김원요(金源堯)가 항의하고, 양치삼 등 9명은 교무실에 들어가 학우의 제적과 유급조치에 심한 항의를 하여 모두 경찰에 구금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관행으로 해 오던 졸업생에 대한 송별연마저 금지하였다.
9일에는 신창진(新昌珍) 외 9명이 학교측에 강경하게 항의하자, 일경이 이들을 모두 구속(拘束)하는 것을 보고, 현도선·홍성옥(洪成玉)·오화국(吳化國) 등은 함께 회합(會合)을 갖고 모든 책임이 교장(校長)에게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날 저녁 때 교장 사택(舍宅)을 습격하였으며, 마당에 있는 장작, 곤봉(棍棒), 돌멩이 등으로 유리창과 가옥(家屋)·기물(器物)을 파괴하였다.
3월 10일에는 동기생인 오화국, 홍경옥, 양공팔 외 다수 학생들이 교장관사로 찾아가 항의하려 하였으나 교장이 출타중이었으므로 그의 처에게 항변하고 공공기물을 부수었다. 마침 교장을 만나러 왔던 제주도립병원장 지바(千葉)가 경찰에 알리자 이들은 체포 구속되었다. 이 때 이두일도 같이 행동했으나 피신하였다가 화북, 조천 등지에서 일본의 부당성을 기록한 전단을 뿌리거나 붙이면서 활동하던 중에 조천경찰관주재소 순사에게 붙잡혔다.
한편 홍계표와 함께 고태리, 양두옥, 고운석, 현도선, 김두진, 신찬익 등은 일제히 교무실로 들어가 그 이유를 따지고 차별교육 철폐를 요구하면서 공공 기물을 던지며 양치삼 등은 교장실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박살내었으며, 일본인 교사를 폭행하였다. 관련 학생이 모두 검거되어 재판을 받을 때에는 사법경찰관 직무취급의 증인 강순극(康淳克)에 대한 심문 중에 “학생 수 명이 교장 부인에게 ‘교장 스기사키를 내놓아라’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난폭한 짓을 했다”고 증언했기 때문에 불리하게 되었다. 1931년 8월 10일 광주지법 제주지청에서 유죄판결이 있자, 항소하여 동년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오화국, 이두일, 홍성옥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 양공팔은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아 미결기간 동안 옥고를 치렀다. 다른 학생들은 다음과 같이 형이 언도되었다.
양치삼(梁致三: 22세, 대림리) 징역 1년 6월 / 홍계표(洪季杓: 23세, 귀덕리)ㆍ고태리(高泰利: 21세, 귀덕리)는 각각 징역 1년 2월 / 신창진(愼昌珍: 19세, 월정리)ㆍ양두옥(梁斗玉: 19세, 신창리)ㆍ고운석(高雲石: 25세, 조수리)ㆍ김두진(金斗珍: 21세, 두모리)ㆍ신찬익(申瓚翊: 21세, 대림리)ㆍ홍성옥(洪成玉: 19세, 귀덕리)은 각각 징역 1년 / 양공팔(梁公八: 20세, 대림리)은 징역 10월, 김원요(金源堯: 20세, 조천리)는 징역 8월에 피고인 모두 5년간 집행유예에 처하였다. 또 김만제(金萬濟: 21세, 명월리)ㆍ고경수(高京守: 18세, 귀덕리)ㆍ문종학(文鍾學: 17세, 삼도리)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4년이 선고되었고, 문종택(文鍾澤: 17세, 삼도리)ㆍ김두석(金斗錫: 16세, 대림리)은 벌금 50원, 유치 50일에 처하였다. 재학생이던 한원섭, 이대인, 김응빈은 제적당했다.(판결문,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수형인 명부, 제주항일인사실기)
이두일 지사는 1931년 8월 3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폭행행위에 관한 법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1931년 10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5년간 집행유예를 받아 출옥하였다. 대구복심법원 판결문이 남아 있다.(제주항일인사실기)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2008년 7월 7일 영면하시어 국립대전묘지(현충원) 애국지사 3묘역에 안장되었다. 2009년 6월 제주 지역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작성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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