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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원리 강일빈 지사 생가 07-01 | VIEW :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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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구좌읍 행원리 1402번지(구좌읍 행원로5길 21-2)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유적(생가)
강일빈(康一彬) 지사는 구좌면(舊左面) 행원리(杏原里)에서 비교적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던 강원부(康元溥)의 아들로 1908년 1월 9일(학적부에는 11월 9일로 되어 있음) 태어났다. 1924년 3월 22일 제주공립보통학교(=제주북초등학교)를 14회로 졸업한 후, 1925년 4월 1일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일본인 교유(교장서리) 야나기다 히코히토(柳田彦二)가 실력은 없으면서 말할 때마다 조선인을 얕잡아 멸시하고 민족차별을 노골화하여 원망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야나기다 교유에 대한 배척운동으로 친구들과 함께 1926년 6월 25일부터 동맹휴교를 주도하였다.
20여일 동안 학교측과 학생 쌍방의 주장이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학교의 산기(山崎) 교유가 전남도 교육당국과 협의한 결과 학교측은 7월 12일 1·2학년 전원에게 무기정학을 부과하였고, 이어 13일에는 1학년 김창일 외 3명과 2학년 강창거 외 10명에게 퇴학을 명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퇴학당한 학생들이 사무실로 쇄도하여 항의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경찰이 출동하여 해산하였고, 이후 퇴학 학생들을 경찰서로 불러 취조하였다.
당시 학교측은 전부 퇴학도 불사하겠다 하였고 학생들도 초지(初志)를 관철하겠다고 하여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으므로 제주청년회가 해결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교유, 학부형, 일반 유지가 선후책강구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사실진상조사위원 5인을 선정하여 학교측과 생도측의 태도와 경과를 조사한 후 14일에 학교 대강당에서 홍순녕(洪淳寧)의 사회로 회의를 진행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하였다.(동아일보 1926년 07월 18일)
1. 유전(柳田) 교유에게는 교육자의 체면에 배리된 행동으로 근신하고 전비(前非)를 반성, 사과토록 경고문을 발송하여 회답을 요(要)할 것
2. 학교측에서는 생도의 퇴학과 무기정학을 취소하게 하고, 생도측에는 즉일 등교케 하여 금후 행동을 조심케 할 것
3.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아니하는 시(時)는 태도가 강경한 편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고 이를 배척하는 동시에 도당국에까지 위원을 파경하여 해결에 노력할 것
실행 위원 : 장용견(張容堅), 채수용(蔡洙鎔), 고석종(高錫鍾), 장희순(張禧淳), 홍순녕(洪淳寧)
7월 16일에는 맹휴 학생 전부를 청년회관에 모이도록 하여 위와 같이 결정되었음을 알리자 학생들은 야나기다(柳田) 교유가 퇴교(退校)하지 않으면 등교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결국 17일에는 경찰이 간섭하여 생도 10명을 소환 취조하기에 이르렀는데, 야나기다(柳田) 교유가 사과하였으므로 무사히 해결되었다(동아일보 1926-07-25)고 하였으나, 2학년 강일빈, 강창거(2005년 애족장), 김희봉(2006년 애족장), 문두희, 문승권, 양유생, 최봉섭, 1학년 김창일은 퇴학이 취소되지 않았다. 야나기다는 평안북도로 전출되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제주농교 동맹휴교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제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은 일본인 교사 야나기다 히코히토[柳田彦二]가 평소에 한국인을 멸시하고 수업 태도도 불성실한 것을 문제삼아 1926년 6월 25일 동맹 휴학을 결의, 실행하였다. 평소 수업에 불성실하고 한국인을 멸시하는 발언을 일삼던 일본인 교사의 퇴출이 목적이었다. 학생들은 부적절한 일본인 교사의 퇴출을 요구했으나 학교 측의 완강한 대응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하루 만에 동맹 휴학을 풀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제주공립농업학교 1학년과 2학년 학생 전원이 무기 정학되었고, 사건을 주도한 일곱 명의 학생들은 퇴학 처분을 받았다. 이 학생운동은 제주 3·1 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한국인을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에 대항하여 일으킨 사건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다. 제주공립농업학교 학생운동은 1931년 민족의식을 가진 학생을 졸업시키지 않은 교장을 폭행한 사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전국의 학교에서 학생 운동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불평등하고 불합리한 식민지 교육 현실이 그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학생들이 가장 문제삼은 것은 조선인 학생을 멸시하는 일본인 교사들의 태도와 홀대받는 조선 역사와 조선어 교육이었다. 이와 같은 교육의 불평등에서 오는 반일 감정은 동맹 휴학이라는 방법에 의해 폭발되어 전국적으로 많은 동맹휴학이 중등학교에서 일어났는데, 제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의 동맹 휴학 역시 이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벌어진 학생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광복후 강일빈 지사는 1947년부터 김녕어업조합장으로 근무중이었고, 부인 이순옥(李順玉) 여사는 김녕리에서 여관을 운영하고 있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 이후 제주도에 입도한 서북청년단 100여명 중 수명이 이 여관에 투숙하였고 이 여사는 돈도 받지 못하면서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1948년 어느 날 김녕지서에서 사환으로 근무하던 행원리 출신 강신중씨가 급하게 연락하기를 행원리, 월정리, 동복리 사람들이 서청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라 하므로, 급히 현장으로 달려가 서청단원에게 처형하지 말도록 애걸하여 십수명의 인명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강일빈 지사는 행원리 582번지(행원리 해안도로 북쪽 바닷가에 위치한 속칭 건난디)에 구좌중앙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일본인(三澤)이 전복을 삶아 말리는 공장을 운영하던 속칭 삼택이막에 1949년(혹은 1951년)에 3년제 사립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설립자 대표는 강일빈, 윤태방, 교장은 이보현, 후원회장은 이배근, 홍두표(洪斗杓)였다. 마을 자체에서 운영한 사립학교였는데, 바다의 일정 구역을 학교 몫으로 정하여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을 팔아 운영비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지속적인 운영난으로 개교 12년만에 폐교되었다.
1958년에는 친족인 강재량 국회의원 선거본부장으로 있으면서 유세중 뇌경색으로 쓰러졌는데, 학생 당시 고문후유증과 겹쳐서 회복하지 못하고 반신불수에 의사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로 20년을 투병생활을 하다 사망하였다. 묘는 행원리 2905번지 가족묘지에 부인 이순옥 여사와 합묘로 되어 있으며 비문에는 항일투쟁 사실은 기록되지 않았다.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작성 20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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