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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암리(원래 봉개동) 양헌수목사선정비 09-22 | VIEW :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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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애월읍 유수암리 263번지(유수암평화8길60) 건승원 관리사 옆
유형 ; 碣(선정비)
시대 ; 조선 후기
양헌수(梁憲洙)는 무신(武臣)으로서 고종 원년(1864) 3월에 제주목사겸방어사로 부임하여 동왕 3년(1866) 8월에 승지(承旨)로 임명되어 나갔다. 그는 부임하는 해에 훈민편(訓民篇)을 저술하여 백성을 가르쳤고 다음해 7월에는 큰 비바람으로 나무가 꺾이고 기와가 날렸으며 모든 곡식이 절종(絶種) 상태에 이르자 성(城)을 돌아보며 통곡하였다고 한다. 삼성사(三姓祠)의 제전(祭田)을 별도로 설치하였으며, 정사(政事)가 명백하고 공평하였으며, 효열(孝烈)을 포상하고 폐막을 없앴으므로 백성들이 추모하여 비를 세웠다.(북제주군 비석총람 686쪽)
梁憲洙의 자는 경보(敬甫)이며 부사정이었던 양종임(梁鍾任)의 아들이다. 이항로의 문인이었으며,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혔다.
헌종14년(184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철종 때에는 참상관(參上官)에 올랐다. 고종2년(1865) 제주목사로서 前판관 백기호(白基虎)의 탐학을 징치하도록 하여 제주도민의 칭송을 받았고, 이해 가을 극심한 태풍의 피해를 복구하는 한편, 진휼을 요청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한 해를 더 연임하였다.
제주를 떠난 후에는
1866년 어영청의 천총(千摠)으로 준천사(濬川司)의 도청을 겸하다가 병인양요를 당하여 정족산성의 수성장이 되었다.
1866년 9월 18일 프랑스군은 병인박해를 빌미로 조선을 무력으로 개항시키고자 3척의 군함을 보내 한강의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물러갔다. 그 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다시 침략해왔다. 침략군은 10월 16일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 정부를 궁지에 몰아 항복을 받을 속셈으로 한강을 봉쇄했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이용희·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양헌수는 순무중군(巡撫中軍) 이용희(李容熙)의 명령에 따라 별군관 이현규와 함께 17명의 초관(哨官)과 경초군(京哨軍) 121명, 표하군(標下軍) 38명, 포수 367명을 이끌고 광성진의 손돌목을 건너 정족산성을 지키던 중, 11월 9일 프랑스 함대의 로즈 제독이 보낸 해군대령 올리비에의 부대 160명을 맞아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군 6명을 죽이고 많은 부상자를 내었으며,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세워 프랑스군이 패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공로로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가 1869년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병사로 재직중이던 1871년에는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신설한 별위사제도의 격려방안으로 매년 도시(都試)를 시행하여 성적에 따라 우대하고 곡식과 면포로 포상하였으며, 이와 같은 치적이 인정되어 특별히 1년을 더 연임하였다. 이듬해에는 당시 황해도 연안에 출몰하던 해적 일당을 체포하여 효시하기도 하였다.
1873년 어영대장에 임명되었고, 1874년 좌변포도대장을 지냈다. 1875년 2월 형조판서가 주어졌으나 실제로 부임하지 않았던 듯하며 8일 뒤 금위대장이 되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당시에는 김병학ㆍ홍순목ㆍ이용희 등과 함께 개국을 반대하는 척화론을 끝까지 주장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집권한 대원군은 민비의 상을 치루는 한편, 척족세력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면서 삼군부(三軍府)를 다시 설치하였는데, 이 때 조영하ㆍ김병시ㆍ김기석 등과 함께 지삼군부사에 임명되었다.
1884년 공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887년 독련사(督鍊使)가 되었다.
1888년 11월 73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2008년 10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문화경제신문 081001)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 병인양요 당시 순무천총이던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서 강계포수 500여명을 매복 시켰다가 습격하여 프랑스 군대를 격퇴시킨 공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고종 10년(1873)에 건립한 승전비가 있다.

유수암리 건승원에 있는 이 선정비는 원래 봉개동 1352번지 비석거리에 세워졌던 것이다. 2020년 9월 고한구(1936년생, 봉개동 거주)의 증언에 따르면 봉개동 비석거리에는 조선시대의 선정비 4개가 있었다. 비석의 주인공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군대 갔다온 후(1959년)에 보니 1개만 남아 있었는데 그게 양헌수 목사(牧使)를 기리는 비석이었다고 한다. 비문은 시멘트로 발라서 일부 글자가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고 한다. 집 근처에 가져다 보관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없어졌고,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야 양모씨가 가져갔는데 유수암리 건승원에 가져다 놨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필자가 고한구씨와 2020년 9월 22일 건승원에 가 보니 관리사 건물 옆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윗부분이 둥글에 마감되어 있고 아래 폭이 조금 좁게 제작된 이 비석은 글자 판독이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앞면 가운데에 〈牧使梁公憲洙淸白碑〉 상단 오른쪽과 왼쪽에 작은 글씨로 〈保民以感〉〈杜私以風〉 중간 정도에서 오른쪽과 왼쪽에 조금 큰 글씨로 〈德合召父〉〈化洽文翁〉으로 보이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同治丁卯五月 日〉〈別(刷)〇〇〇奉盖〉라는 글자가 있다. 同治 연간에 정묘년이면 1867년이고, 奉盖라는 글자로 보아 나머지 판독불가능한 글자들은 인근 마을 이름으로 추정된다.
건승원 관계자에게 원래 위치인 봉개동으로 가져가겠다는 말을 해 놓은 상태이다.
《작성 2020-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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