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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리 오정숙(吳禎淑) 지사 묘 01-07 | VIEW :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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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남원읍 한남리 179-9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독립운동가 집터
오정숙(吳禎淑. 1891.10.02.∼195810.26.) 지사는 軍威吳氏 오찬백(吳贊伯)의 아들이다. 한때 민족종교인 보천교를 믿었으나 1936년 11월경 강승태(姜昇泰)의 권유로 무극대도교를 믿게 되었다.
무극대도교는 중문면 하예리 출신 강승하(姜承河=姜昇泰 1894∼1960)가 1930년 1월 27일 강증산의 현몽으로 영통(靈通)을 받았다고 하며 지상의 대도사회(大道社會)를 건설한다는 설교로 제주 지역에 창시한 민족종교이다. 1936년에 안덕면 동광리에 무극대도 포교 본부를 두어 한학에 조예가 있는 항일 인사와 과거 보천교(普天敎) 교도들을 포교의 대상으로 삼았다. 보천교 및 정감록, 풍수설 등과 무속신앙을 혼합하여 우주만물의 흥망성쇠는 무극대도교의 법리에 의해 좌우된다고 하는 논리로 창설한 종교이다. 신앙의 대상은 단군, 옥황상제(증산), 산신, 마테오리치 등이다.
도주(道主) 강승태의 설교를 중심으로 이 종교의 취지를 살펴보면 음양오행설, 정감록 등을 기본으로 믿고, 민족전통의식과 증산교 계통의 동학사상을 첨가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일제의 침탈에 강한 저항감을 가졌으며 우주만물의 흥망성쇠는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무극대도의 여러 법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이들은 외세를 배격한다든지 일제에 저항하는 내용의 한시를 지으며 서로를 다짐하였다. 강승태의 시〈日蚊胡境魂哭時(일본 모기가 오랑캐 땅에서 앵앵거릴 때) 露蜂支那衰亡情(러시아는 중국의 쇠망에 동정하오) 米蠅善心自哭莫(미국 파리는 선심쓰며 곡하지 마오) 支那萬里蜉蝣晴(중국천지 하루살이로 날이 개었네)〉는 외세를 배격하는 대표적인 내용이다. 그리고 경진년(1940)에는 진인(眞人) 정도령이 중문면 대포리에 상륙하고 도주 강승태가 충청도 계룡산에 터를 잡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천자(鄭天子)가 천하를 지배하고 대통(大統)세계를 건설한다고 하였다.
이 시기는 1935년 이래 중국에서는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났으며 이에 1937년 일본은 중국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여 중일전쟁이 벌어지게 된 시기이다. 무극대도교는 포교 과정에서 일본의 패망과 조선 독립을 예견하며 새로운 세계의 건설이라는 이상향을 제시하고자 하였고, 강승태는 1937년 11월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일본의 패망을 역설하고 정도령이 출현하여 조선은 독립할 것이라는 이상 세계를 제시하여 천여 명에 가까운 신도를 확보하였다.
이를 주시하던 일본 경찰은 이들의 세가 커지자 무극대도교를 탄압하기에 이르렀는데 일본인 다니모도(谷本) 고등계 주임에 의해 조사되어 1937년 12월 13일 새벽 강승태를 비롯한 신도 350여 명을 일제히 잡아들여 9개월에 걸쳐 조사를 벌였다. 조사 후 신도 67명을 광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하고, 이중 23명을 구속하였으며, 44명은 불구속으로 송치하였다. 1938년 12월 13일에도 핵심 신도 다수를 검거하여 취조 끝에 21명을 기소하였다. 신도 김경식(71세, 화북)은 구속 심문 중 심한 고문을 받아 1940년 8월 18일 옥사하였다.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방법원 형사부는 교주 강승태를 불경(不敬), 사기, 강간치상, 육군형법·해군형법·보안법·의사규칙 위반 등의 죄목으로 징역 6년 및 벌금 200원의 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강승태는 만기가 되어도 출옥을 하지 못하고 광복이 되어야 나왔다. 다른 이들도 불경죄, 사기, 강간치상, 육군형법·해군형법·보안법 위반, 범인 은닉, 수렵규칙 위반, 총포화약췌체법 위반 등 온갖 범죄로 옭아매어 판결하였다. 판결시에 구속기간을 형기에 산입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은 판결된 형기를 채우고도 석방되지 않았다. 이는 반성문이나 전향서를 쓰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무극대도교는 일제가 사교집단으로 매도하여 홍보함으로써 자연히 소멸단계로 접어들었으며 강승태 도주가 출옥한 후에 신앙활동이 이어지긴 했으나 현재에는 봉개동 명도암마을에 도당이 있으나 신도는 몇 명에 지나지 않는다.
오정숙 지사는 무극대도교에 입교한 후 서방주(西方主)·仁義道師禪聖君이라는 칭호를 받아 핵심 신도로서 포교에 활약하였다. 그에 대한 판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6년 5월부터 1937년 6월까지 山王祭, 神將祭, 정례고천제(精禮告天祭), 도주통령기념제(道主統靈承記念祭), 特別祈願祭, 冬至祭, 도주계통승계기념제(道主系統承繼記念祭) 등 10차례의 제에 참석하여 조선이 독립되고 세계를 통일하도록 기원함.
󰋮1937년 5월 1일 한라산 정상 부근에서 지내는 산왕제의 제물로 꿩을 포획할 목적으로 가시리 오경화로부터 화승식 총 1정을 빌려 4월 27일, 28일, 29일에 관할 경찰서장의 허가를 받지 않고 총을 사용함.
󰋮위와 같은 일로 1937년 12월 일본 경찰 다니모도(谷本)에게 피체되어 1940년 12월까지 심한 고문을 동반한 취조를 받은 후 기소되어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 결과 보안법 위반, 수렵 규칙 위반, 총포화약 취체령 시행 규칙 위반이라는 죄목으로 징역 1년 및 벌금 50원형을 받고 복역함.(미결기간 3년을 형기에 산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약 4년 이상 옥고를 치른 것으로 추정)
출옥 후 행적은 확인하지 못하였으나 세화3리 김춘보(무극대도교 신자의 아들)씨에 의하면 고향에서 농사를 짓다 돌아가신 것으로 추정되며, 아들이 있으나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도내에는 외손이 세화3리에 살고 있다. 생가 터에는 건물이 없고 과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였다. 묘는 외담으로 둘러져 있는데 산담 안에 사스레피나무가 한 줄로 빙 둘러 심어져 있고, 찔레나무와 각종 잡초가 뒤덮인 것으로 보아 십수년 동안 벌초를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99년에 세운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다.
〈無極大道仁義道師禪聖君五禎淑之墓 公諱禎淑 本貫軍威吳氏 入島祖羅州營將諱碩賢之十八世孫 考諱贊伯之長子也 配慶州金氏生一男二女 男奉南娶延州玄氏元吉生一男 娶金海金氏柄生生四男一女 長子甲烈次子朱烈三子太烈四子正春五子正夫 長女秋菊壻金允王生二男一女 二女辛生壻金吉浩生二男六女 餘孫煩不記 日本大阪市野區田島町一丁目一三一五番地內母親奉南甲烈卒 配忌八月十五日 墓水望境자기남도壬坐 西紀一九九年乙卯冬 묘주대리 吳太洙 女 秋菊 辛生 謹立〉※앞면 이름 앞에 성을 五라고 쓴 것은 吳의 잘못, 大阪市野區는 大阪市生野區의 잘못으로 추정되며, 김해김씨에서 난 자식을 四男一女라고 쓴 것은 五男一女의 잘못이라고 생각됨.
《작성 21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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