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 
덕천리 강승태(강승하) 지사 묘 02-16 | VIEW : 34
[크기변환]덕천리_강승태도주묘(2102)2.jpg (747.9 KB), Down : 0
[크기변환]덕천리_강승태도주묘(2102)4_1.jpg(765.6 KB), Down : 0




위치 ; 구좌읍 덕천리 94-1번지
시대 ; 일제강점기∼대한민국
유형 ; 묘

강승태(姜昇泰. 1895.05.02.∼1959.02.09.) 지사는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 도주(道主)로서 독립운동을 하신 분이다. 다른 이름으로 承河, 升玉, 昇華, 昇泰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창씨개명할 때에는 岡本承河로 했다. 호는 龍江, 도호(道號)는 尙尼이다.
全羅南道 濟州島 中文面 下猊里 231번지가 본적으로 되어 있으나, 안덕면 上川里에서 姜彛鎬의 서자로 태어나 上猊里 2276번지에서 살았다. 1903년부터 약 2년 동안 한문을 수학했다. 1907년에는 아라리 관음사(觀音寺)에서 불교 공부를 하기도 했다. 1908년에는 목포에 가서 한의학을 공부했으며 농사도 지으면서 살다가 1917년에는 태을도(보천교)를 믿었으나 특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시력을 잃었다.
1924년부터 全北 金堤로 가서 修道 생활을 했는데 1930년 꿈에 증산천사(강증산=강일순)를 만나 ‘너는 이후 10년간 크게 성공할 때까지 맹목적으로 오로지 수도를 하라’는 신명(神命)을 받아 繼統(법통을 이어받음)하였으며, 1931∼1935년에는 하예리에서 後天大道起運禮를 致誠으로 奉行하며 修道에 정진하였다. 1936년 1월 27일(음력 1월 4일) 오후 9시경 제주도 안덕면 동광리 강위경(姜渭慶) 집에서 무극대도교(無極大道敎)를 창설하였다. 그리고 포교하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독립운동을 하였다. 이 사건의 판결문에는 강승태 지사의 죄목이 불경, 사기, 강간치상, 육·해군 형법, 보안법, 의사규칙 위반이라고 되어 있다.
󰋮1936년 1월 27일 안덕면 동광리에서 무극대도교를 창설할 것을 협의하는 과정에서부터 1937년 12월까지 포교하는 과정에서 31회에 걸쳐 무극대도교 신도들에게 일본천황이 1940년 폐제(廢帝)되고 조선이 독립하여 전세계를 72개국으로 나누어 지배할 것이며, 그 때에는 각국의 왕은 물론 일왕(日王)도 조선의 천자에게 조공하게 된다고 말함.
󰋮1936년 8월 6일 토산리 김창규의 집에서 東方皇星落이라 작구(作句)하여 김창규, 강석구, 김태휴 등에게 동쪽의 황제를 지키는 별이 떨어졌으니 이는 일본의 운이 쇠미(衰微)한 것이라고 말함.
󰋮1936년 11월 13일 교래리 조린납 지경에서 시행한 국운회복공사를 주관하여 無極旗·太極旗·삼선홍문기를 게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일본천황에 대한 동방요배를 철폐하기로 하였으며, 1937년 2월 25일 모슬포 지경에서 신도 9명에게 對日抗戰하여 반드시 이기겠다는 血書를 써서 盟誓하도록 지시함.
󰋮1937년 1월 26일 안덕면 동광리 양기현의 집에서 紅氣半天日家亡 徐市過處回孫失(붉은 기운이 하늘을 반분하니 일본이 망하고 서불이 지나가 머문 자리의 후손이 없어지다)이라는 시를 지어 동년 8월까지 강석구 外 5명에게 위 구절을 일본이 가까운 장래에 멸망하는 징조라고 설명함.
󰋮1937년 7월∼8월 日蚊胡境魂哭時 露蜂支那衰亡情 米蠅善心自哭莫 支那萬里蜉蝣晴(일본을 모기에 비유하고 오랑캐 지경에서 곡을 한다고 표현)이라는 시 등을 지어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할 것이라고 講書함.
󰋮소화12년(1937) 8월 10일 양기현 집에서 일모구형삼국재감(日暮狗形三國災感) 일모우형만국재감(日暮牛形萬國災感) 일모계형일국재멸(日暮雞形一國災滅)이라는 시구를 지어 신도들에게 「해질녘 태양의 모양이 개와 같이 되니 삼국이 망하고, 해질녘 태양의 모양이 소와 같이 되니 만국이 망하고, 해질녘 태양의 모양이 닭과 같이 되니 일국이 멸망할 터이나 지난 음력 7월 2일(8월 6일) 해질녘은 똑바르게 소의 모양이니 현재의 중국사변은 세계대전까지 발전하고 만국이 멸망함은 의심 없다.」고 講說함.
󰋮1937년 9월 “중일전쟁에서 대정면 모슬포 지역에서 2∼3대의 일본군 비행기가 추락했고, 72대가 행방불명되었으며, 일본의 비행기는 서쪽으로 가는 것은 있으나 동쪽으로 돌아오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으나 사실은 패전을 호도(糊塗)하고 있는 것이다”는 말과 함께 일본이 조선인을 군인으로 모집할 때 신자(信者)들을 내보내지 않겠다고 말함.
󰋮1936년 4월부터 1937년 11월까지 20여회에 걸쳐 국운회복(國運回復) 대치성(大致誠)과 구국산천대제(救國山天大祭. 한라산 王將石 광장), 도내 각지에서 西方主告天祭, 開運祭, 神將祭, 山王祭, 神將祭, 情禮告天祭, 道主統靈記念祭, 特別祈願祭, 重陽祭, 冬至祭, 道主系統承繼記念祭, 道主誕生記念祭 姜甑山死亡記念祭, 七夕祭, 姜甑山誕生記念祭 등의 제를 지내면서 일본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 등에 대한 예언을 하고, 조선이 독립되고 세계를 통일하도록 기원하는 심고문(心告文)을 구송함.
위와 같은 일로 1937년 12월 13일 일본 경찰에 피체되어 1940년 11월까지 심한 고문을 동반한 취조를 받은 후 기소되어 1940년 12월 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 결과 불경, 보안법·육해군형법 위반 등으로 징역6년형 및 벌금 200원형을 받고 복역했다. 미결기간을 모두 형기에 산입하지 않고 300일만 산입하였기 때문에 계산상 징역형은 8년2개월이 되는데 해방이 되어야 출소하였으니 실제 징역 기간은 7년8개월3일이다.
출소 후에는 주로 상도리 김문일의 집을 본부로 삼아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1956년 12월에는 무극대도 본소를 봉개동 명도암으로 이전하여 포교를 계속하다 1959년 8월 별세하였다. 처음에는 명도암 본소가 있는 옆에 묻었었는데 1970년경에 덕천리로 이장하였다. 비석에는 無極大道道主姜公昇泰之墓라고 새겼다.
무극대도교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독립운동은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니 감옥에 갔다온 것을 내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 유지를 받들어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었는데 최근에 제주독립운동가서훈추천위원회가 동사건 관련자 후손들을 찾아내어 모임을 만들고 합동으로 서훈신청을 하기로 하였다.
《작성 2021-02-16》
 PREV :   이호2동 고전적(고홍진) 집터
 NEXT :   신흥리 큰물(용천수)
 LIST   
Copyright 1999-2021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