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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당리 한영섭 지사 묘 03-20 | VIEW :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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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구좌읍 송당리 1450번지(송당리 1445-1번지로 들어가서 1451-1번지와의 경계를 따라 70m 정도 지점에서 숲 속으로 들어가면 약 50m 지점에 묘가 있다.)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묘
비문 〈전면〉學生韓公永燮之墓
〈왼∼뒤∼오른쪽〉公은 淸州后人濟州入島始祖23世孫이시며 父晳堅母慶州金氏南平文氏의 長子로 서기1910년 5월 14일 出生, 京城 養正高普 5년 在學時 光州學生事件 主謀者로 數次 投獄, 1931년 1월 15일 於日本東京 弱冠 下世하셨으니 故鄕 靑年 同志들이 望思碑를 마을 동족 동산에 建立하였었고, 公의 ◉◉하셨든 書籍 500余 卷을 土台로 眞理探究하시다가 兩事件으로 日本警察에 檢擧當하여 其中 宋健浩 夫生鍾  金才童 同志는 獄死하시다. 舍弟 元燮長子 在瀅 立系 慰勞奉祀라. 子婦는 卓慶愛요, 孫은 定錫 旻錫 尙錫 東佑라. 서기1980년 春 朝天面 咸德里 弟元燮 謹竪
함덕리 출신 한영섭(韓永燮) 지사가 동경에 유학 중 공산주의 계열로 독립운동을 하다 1931년 1월 15일 일본 도쿄(東京) 순천당병원에서 사망, 동월 19일 그 시신이 향리에 도착하게 되자 동지장(同志葬)으로 할 것을 결의하였다. 한윤섭의 집에 모여서 󰡒추도 적혁(赤革) 한영섭의 영󰡓, 󰡒불평등한 사회를 타도하고 무산계급의 자유를 건설하려고 그대는 죽었지만 그대의 주의 정신은 동지인 우리들에게 계승되어 분투할 것이니 고이고이 진좌(鎭座)하라.󰡓라는 내용을 적은 만장(輓章)기를 만들어서 다음날 장례식에 세워놓았다.
동월 22일 한영섭의 조부 한정권(韓程權)의 집에서 대흘(大屹)리 장지까지 행상하면서 동지들과 적기가(赤旗歌, 혁명가)를 합창하고 "한영섭 만세"를 삼창하였다. 청맹원(靑盟員=함덕청년동맹회원)들과 의논 끝에 1월 17일 각각 30전 또는 50전을 내어서 비석을 매입하여, 비문은 송건호(宋健鎬)가 짓고 김진희(金晋熙)가 글자를 새겼다. 비의 표면에는 󰡐동지적광한영섭기념비(同志赤光韓永燮記念碑)󰡑, 이면에는 󰡒차디찬 흰 빛 밑에 늘니인 무리들아 고함쳐 싸워라고 피 흘린 동지였다.󰡓라고 항일의식과 계급의식이 들어간 비문을 썼다. 그리고 이 비석을 같은 날 공동 우물(고도물) 부근 사람들의 눈에 잘 띄게 세웠다.

이에 일제 경찰은 비석의 문구가 불온하여 안녕질서를 방해하였다는 이유로 함덕리에 형사들을 파견하여 3월 29일부터 청년 20여 명을 검속하여, 조기(弔旗), 비석, 상장(喪章) 등은 몰수하였다. 비를 세운 김일준(金日準), 부생종(夫生鍾), 김재동(金才童), 양구문(梁龜文=梁共根), 김두성(金斗性), 고종건(高宗虔) 등을 보안법 위반으로 검거하여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 후에도 1931년 5월 6일 조천 경찰관주재소 순사 2명이 함덕리로 출장, 고(故) 한영섭의 부친 한문옥(韓文玉)에게 찾아가 본서(本署)의 명령이니 아들의 관(棺) 속을 조사하겠다고 하였다. 장지로 가서 흙을 파고 관 안을 수색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불온문건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런 내용의 기사가 조선일보(1931-05-14)에 실렸다. 이에 일경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커졌다.(북제주군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제주의소리 2007-04-02) 이후 한영섭의 묘는 송당리 1450번지로 옮겼다.
《작성 202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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