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min 
세화리 문도배 지사 집터(혁우동맹 조직처) 03-21 | VIEW : 169
문도배_지사_기사.JPG (139.7 KB), Down : 0
크기변환_세화리_문도배지사생가터(2002)5.JPG(528.7 KB), Down : 0




위치 ; 구좌읍 세화리 1222번지(현재는 집이 없고 농사짓는 밭)
시대 : 일제강점기
유형 ; 위인선현 유적

문도배(文道培 1908~1953) 지사는 1927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30년 3월 신재홍(申才弘), 오문규(吳文奎), 강관순(康寬順), 김성오(金聲五), 김순종(金順鐘), 김시곤(金時坤), 부대현(夫大炫) 등은 문도배의 집에서 혁우동맹을 조직하였다. 1930년 9월 20일에는 이곳에서 해녀 본위의 조합 설립을 협의하기도 했다.
혁우동맹은 1930년 11월 초순 혁우동맹 조직이 발각될 위험에 처했고, 1931년 1월 하순에 목적수행상의 효과가 적다는 이유로 해체가 논의되었다. 당시 전국적으로 공산당재건운동이 전개되면서 1931년 4월 해체하였다.
혁우동맹 해체 후 1931년 5월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사회주의 운동의 세포 조직)가 새로 조직되었고, 제주도 야체이카 구좌 지역 담당자 신재홍은 1931년 7월 오문규와 문도배를 당원으로 가입시켰다.
문도배 지사는 신재홍․강관순․김순종․김시곤 등과 회합하여 1930년 11월 초순 사회 운동의 방략에 대해 논의하였다. 1931년 후반부터 해녀들의 관제 해녀조합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에 청년 운동가들은 야학을 통하여 부녀자들을 지도하여 1932년의 해녀 항일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1932년 1월 해녀 1,000여 명이 참여하는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전 제주도에 걸쳐 청년 운동가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문도배도 이 일로 체포되어 1933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하였고,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받았다.
광복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구좌면 위원장과 구좌면 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10월 미군정이 정권을 인도하기 위해 설립하였던 과도적 성격을 띤 입법 기관인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의원 선거에서 김시탁과 함께 당선되었으나 11월 남조선과도입법의회 참여를 거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2003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2018년도 7월 제주 출신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1948년 제주4·3사건이 발생하면서 후환을 우려한 문도배와 그의 가족들이 모두 일본으로 이주해버렸기 때문에 문도배 지사가 살았던 집터에는 현재 건물은 사라지고 농경지로 변모했다. 다만 밭 가운데에 있는 수백년생 비자나무와 그 주위에 건물에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판석이 5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참고 문헌
⊙1933년 6월 5일「김한정 등 24인 판결문」(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32년 12월 11일, 「濟州島秘社事件 四十名 全部起訴」·「濟州島事件 豫審終決書(1)」
⊙『동아일보』, 1932년 12월 14일, 「濟州島事件 豫審終決書(2)」
⊙『조선중앙일보』, 1933년 6월 6일, 「제주혁우동맹, 최고 5년역 언도」
⊙김찬흡,『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군, 2005, 323-324쪽
《작성 2020-03-21》
 PREV :   선흘1리 선흘분교장
 NEXT :   송당리 한영섭 지사 묘
 LIST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