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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리 큰곶도(잃어버린 마을) 터 03-17 | VIEW : 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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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구좌읍 덕천리 780-2번지, 799-3번지, 800번지, 801-2번지, 804번지 일대
시대 ; 대한민국
유형 ; 마을 터(잃어버린 마을)
덕천리는 크게 상덕천과 하덕천으로 나뉘며 그밖에 된밭과 큰곶도라는 작은 마을을 합쳐서 100여호가 살았던 마을이다. 4・3 시기에는 중산간 지역에 위치한 탓에 서북청년단 등 토벌대의 주요 표적이 되었고, 소개 이전에도 걸핏하면 마을에 들이닥쳐 젊은이들을 빨갱이라며 두들겨팼다. 이에 젊은이들은 미리 인근 야산에 피하여 생활하곤 했다. 소개 이전 무장대와 토벌대에 의한 주민피해가 더러 있었지만 대규모 희생은 없었다. 그러나 1948년 11월 18일 덕천리가 초토화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소개령이 미리 전해져서 인명피해 없이 피난을 갔지만 소개지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데다 인명피해가 엄청났다. 소개령에도 내려가지 않은 노약자들이 마을에서 희생되었고, 김녕에 피난간 주민 17명이 한꺼번에 집단총살되기도 했다.(제주4・3유적Ⅰ)
김용(1940년생) 노인회장은 "소개령 이후 김녕리 등 바닷가 마을로 내려가서 5년을 살다 올라왔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대부분 죽었고 마을을 재건해서 살아가기 위해 처절한 시절을 보냈지요. 연좌제 피해는 더욱 아픈 상처를 줬습니다."라고 증언하였다.(한라일보 2016-03-29)
4・3 당시 큰곶도에는 정삼용, 고명옥, 김대봉, 김대원 등을 비롯하여 10여 가호에 50여명이 살았던 마을이다. 큰곶도는 대림동이라고도 부른다. 4・3 당시에는 이 마을에 김창봉이 운영하는 큰 대장간이 있어서 종업원이 20명에 이를 정도로 커서 종달리 소금밭에 쓰던 큰 솥과 인근 마을에서 필요로 하는 보습이나 벳 등 농기구를 제작하기도 하였다.(제주4・3유적Ⅰ) 이는 제주 동부 유일의 불미터였다. 이대진(1938년생) 어르신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대오름 동쪽 양질의 찰흙이 있는 곳에서 기와를 굽고 쇳물을 녹여 솥이나 농기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인근 오름에서 땔감을 쉽게 얻을 수 있었던 환경적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옛날 덕천 마을은 주로 기와집들이 많은 동네였다고 한다. 다른 마을이 주로 초가집이었던 것에 비하면 부자마을이었다는 의미다."(한라일보 2016-03-29)  
그러나 초토화로 인해 이곳도 모두 폐허가 되었다. 1948년 11월 18일 덕천리 전체가 초토화되면서 이곳 주민들은 김녕 등 구좌면의 해안마을이나 조천면의 해안마을까지 연고를 찾아 피난생활을 하였다. 소개한다는 정보가 미리 알려졌기 때문에 소개과정까지는 인명피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소개를 떠나지 못한 사람이나 소개를 떠났더라도 도피자 가족으로 몰린 주민들은 희생당하는 비극을 치렀다. 이후 덕천리를 재건할 때에도 본동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이곳 큰곶도는 끝내 재건되지 못하고 말았다.(제주4・3유적Ⅰ) 현재 큰곶도 마을 터에는 대림동이라는 버스정류소 표시가 있고, 길 남쪽에 별장 주택 한 채, 덕천올레길식당이 있으며, 길 북쪽에 1채의 집이 지어졌고, 6채의 건물로 구성된 미니펜션이 있다.
《작성 2020-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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