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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리 마을성담② 03-18 | VIEW :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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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북촌리 1267번지와 1268번지의 경계. 정지폭낭 북쪽 창고 서쪽
시대 ; 대한민국(1949년)
유형 ; 방어유적(마을성담)
1949년 1월 17일 군인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태워지고 수백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북촌리 대학살은 마을의 존립근거를 없애 버린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날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인근 함덕리 등지에서 온갖 멸시를 받으며 소개생활을 하다가 1949년 3월 경 폐허가 된 마을로 돌아와 1차 성을 축조하여 성안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이 때의 상황을 황요범 선생은 『애기무덤』(2019)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악몽이 휩쓸고 지나간 마을의 곳곳마다에는 우두커니 서 있는 험상궂은 울담만이 흉측스럽게 몰골을 드러내고 있었다. 온 마을이 마치 까만 잿빛으로 뒤덮인 것처럼 온 세상이 까맣다. 서너달 전만 하더라도 한겨울의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하루를 굶었어도 춥고 배곯은 걸 모르고 살았던 삶의 보금자리였다. 안팎거리의 집에는 검게 그을린 돌담이 흉측하게 서 있고, 고팡 자리에 쌀독의 쌀은 새까만 숯덩이로 변해 있었다. 외양간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밭갈쇠는 길바닥에 죽어 있었다. 살림집을 찾아왔는데 눈앞에 전개되는 참담한 모습 앞에서 모두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님은 남편이 죽었어도 나오지 않던 울음이 터져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내렸다. 서너달 동안 쌀 한 줌을 동냥질했던 피난살이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져 앞으로 살아갈 길이 막막하였다. 큰외삼촌과 숙부님이 소나무 몇 개를 구해와서 조그만 초막을 마련해 주었다. 비가 오면 이곳저곳에서 비가 줄줄 새고, 눈이 올 때면 안쪽까지 눈발이 스며들었다.〉 이 시기에 현재의 이사무소 맞은편에 경찰파견소가 설치되어 10여명의 경찰이 주둔하기 시작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마을 외곽으로 2차, 3차 성을 보강 축조하였는데 마을의 밭담이나 산담은 물론 바닷가의 돌까지 운반해서 쌓았지만 하루종일 축성작업에 동원되어도 밀가루 한 되를 받아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15개 정도의 보초막을 만들어 남녀노소 관계없이 교대하면서 24시간 경비를 섰다. 파견소 경찰의 지휘를 받으면서 3년 넘게 성을 쌓고 지키는 과정이 계속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주민들의 삶은 피폐를 거듭하였다.
한국전쟁이 끝날 시기쯤에는 성담이 거의 해체되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성담은 3차 때에 축성된 것인데 높이 3∼4m, 하폭 2m, 상폭 50㎝ 정도의 겹담으로 25m 정도가 남아 있다. 북촌리에서는 1950년대 중반까지도 성담 안에 보초막이 있었고 여기서 보초를 섰다고 한다. 보초막과 보초막 사이에는 돌을 집어넣은 깡통을 줄에 매달아 신호를 보냄으로써 잠드는 것을 방지하곤 했다.
《작성 202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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