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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리 정난주마리아 묘 丁蘭珠墓 10-24 | VIEW : 11,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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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주마리아 묘 丁蘭珠墓
문화재 지정사항 ; 비지정
시대 ; 조선
위치 ; 대정읍 동일리 9번지

정난주의 묘는 대정읍 동일리·신평리·보성리의 경계지역에 있다. 보성리에서 서쪽으로 마을을 곧 벗어나면서 좁은 포장도로로 우회전하여 모슬봉을 향하여 1Km쯤 가면 네거리를 만나게 되는데 좌회전하면 대정고등학교 앞으로 연결되는 길이고, 우회전하여 시멘트 포장된 소로를 따라 다시 1Km쯤 가면 성역화된 정난주마리아의 묘에 이른다. 그녀의 이름은 명련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난주는 한국 천주교 103인의 성인에는 포함되지 않으나 모진 시련을 신앙으로 이겨내고 선교와 이웃사랑에 평생을 바친 사람이다. 서기1773년 나주 본관 정약현과 경주 본관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정난주는 당대 최고의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로서 숙부의 가르침을 받아 천주교에 입교했으며 1791년 황사영과 혼인했다. 정약현의 형제를 보면 정약종, 정약전, 정약용이다. 고모부는 조선 천주교 사상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세례명 베드로)이다. 어머니는 이 나라 신앙의 성조인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의 누이였다.(제민일보 4343년 11월 20일)
남편 황사영은 약관 16세에 초시, 17세에 복시에 장원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왔으나, 입신양명의 길을 버리고 처숙인 정약용의 인도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에게서 알렉산드르라는 세례명으로 서울지역의 천주교 전파에 지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박해의 길을 걸었다.
(신유박해http://cafe.daum.net/petrus/3pKX/428?docid=RwDS|3pKX|428|20100525130443&q=%BF%C1%C3%B5%C8%F1&srchid=CCBRwDS|3pKX|428|20100525130443)
1801년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나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提川)의 배론[舟論]이라는 토기 굽는 마을로 몸을 숨겼다. 그러던 중 박해를 피해 배론에 찾아온 황심(黃沁)과 함께 조선교회를 구출할 방법을 상의한 끝에, 베이징에 있는 구베아 주교에게 신유박해의 전말과 순교자 현황을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위한 외국의 지원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를 작성하여 중국으로 보내려 하였다. 옥천희(玉千禧)와 황심이 10월에 떠나는 동지사(冬志使) 일행에 섞여 편지를 가지고 가려 했는데, 9월 20일과 26일에 체포되었으며, 이어 황사영도 9월 29일 붙잡힘으로써 그들의 계획은 실패했다. 황사영은 능지처사(陵遲處死)로 순교하였으며 그 결과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 처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현에, 아들 경한(2세)은 영광군 추자도에 유배되었다.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는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신앙의 자유를 강구하기 위해당시 베이징[北京] 주교에게 보내고자 했던 청원서다. 두 자가량 되는 명주천에 썼기 때문에 ‘백서(帛書)’라고 한다. 가로 62cm, 세로 38cm 정도의 고운 명주에 깨알같이 작은 바른 해서체로 또박또박 씌여졌는데 모두 122행·13384(혹은 13311)글자나 되는 방대한 내용의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황사영백서의 내용은 크게 3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주문모 신부의 처형 등 신유박해의 순교자 내력을 설명한 후 이번 박해로 천주교가 이 땅에서 멸망할 위기에 처했음을 언급했다. 둘째, 조선 교회의 재건을 위해 서양의 여러 나라로 하여금 재원(財源)을 지원해주도록 요청했다. 셋째,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으로 ①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어 조선도 선교사를 받아들이게 하거나, 조선을 청나라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하는 것, ② 서양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에게 호소하여 배 수백 척과 군사 5만~6만 명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국왕으로 하여금 전교사(傳敎師)를 받아들이거나 조선이 정복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자고 주장했다. 위의 내용 중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황사영의 대책은 충격적인 것이었으므로 조선정부는 관련자들을 처형함은 물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한층 더 강화했다.(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closed/read?bbsId=D117&articleId=517244 다음 아고라)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에서 《황사영백서》는 민족 감정에서 나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왔지만, 한편 교회의 평등주의라는 원칙과 근대적 인권운동의 선구자로서 당시 조선 사회에 미친 혁명적인 영향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일부 사가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황사영은 이 백서가 관변측에 압수됨으로써 1801년 대역 죄인이 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원본은 현재 로마 교황청 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교황청에서는 이를 200부 영인(影印)하여 세계 주요 가톨릭국에 배포하였다고 한다.(http://cafe.daum.net/nbclove/천주교녹번동성당 카페) 황사영백서는 발신자가 '황심(黃沁, 多默;토마스)'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중국에 있는 선교사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 황심뿐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전달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사람은 황심이 잘 알고 있던 옥천희(요한)이다. 수신인은 주교라고만 되어 있는데 그는 북경교구장으로서 프란치스코 회원인 포르투갈인 구베아 주교이다.(황사영백서해제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겠습니까 10∼11쪽)
황사영과 그와 관련된 자들을 신문하고 있는 동안 동지사(冬至使)가 출발해야 할 시기가 다가왔다. 그런데 이번 박해에 저명인사들이 많이 관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국인 주문모를 처형한 사건을 변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므로 조정에서는 조윤대(曺允大)를 동지사 겸 진주사(陳奏使)로 임명하는 동시에 가지고 갈 <토사주문>(討邪奏文)의 내용과 진주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토사주문>은 대제학(大提學) 이만수(李晩秀)가 작성하였고, 주문내용의 증명으로 <백서>의 사본도 갖고 가기로 하되, 그 중에서 불리한 내용은 이를 삭제하여, 그 내용을 대폭적으로 축소시킨 소위 <가백서>(暇帛書)를 가지고 갔다.(천주교학운동성당)
가백서는 65자씩 15행 도합 860자 정도이며 동지사겸진주사가 청나라 황제에게 보고하여 청나라의 양해를 구하였다. 오늘날 전하는 백서는 원본과 사본 2종이 있으며, 이것은 신유박해 후 근 백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보관되어 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 뒤 발견되어 당시 조선 천주교회를 지도하던 뮈텔 주교에게 넘어갔다.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순교복자 79명의 시복식이 거행될 때 교황에게 전달되어 지금은 로마교황청에 보관되고 있다.(블로그 '언덕에 올라')
이렇게 해서 황사영 사건이 일단락되자 조정에서는 박해의 전말과 옥사(獄事)를 변호하는 반교문(頒敎文)을 준비하면서, 아직도 처결되지 않은 사학죄인은 세전(歲前)에 그 집행을 끝내도록 지시하였다. 드디어 12월 22일 토사교문(討邪敎文) 즉 <척사윤음>(斥邪綸音)이 반포됨으로서 공식적으로 신유박해는 끝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끝났는데, 박해로 희생된 자들의 수는 처형된 자가 약 100명, 그리고 유배된 자가 약 400명으로 도합 500명선에 달하였다. <토사교문>의 반포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은 일단 멈추었으나, 천주교를 국가의 원수로 단정함으로써 앞으로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 되어, 천주교 전파에 커다란 장애물로 등장하였다. 어쨌든 신유박해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거의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교인들도 유배를 당했거나 생명유지를 위해 산간벽지로 피신하지 않을 수 없어 거의 빈사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천주교회는 그 후에도 전국적인 규모는 아닐지라도 크고 작은 박해를 끊임없이 받으면서, 신앙을 굳게 지켜나갔고, 선교사를 다시 영입하려는 시도를 계속했다.(천주교학운동성당)
이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자, 또한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신유박해 이후 살아남은 신자들은 수도와 박해지를 피해 강원도와 경상도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이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배교자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반면에 새로운 입교자도 늘어갔다.(가톨릭신문 전수홍 신부의 글)
혈혈단신으로 제주목 관노로 유배된 정난주는 정난주는 화북포구를 통해 제주에 도착해 중산간 길을 거쳐 대정현의 유배지로 향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주 천주교사를 보면 정난주는 제주에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알린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제민일보 4343년 11월 20일) 유배의 모진 시련을 신앙과 인내의 덕으로 이겨냈으며,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학식으로 주민들을 교화하여 노비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서울할머니」로 칭송을 받아 왔다. 따라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정 고을의 유지 김석구(金錫九, 1780~1870) 집에서는 그녀를 침모로써 일하게 하고 불편없이 생활하게끔 별채까지 마련해 주었다.(http://cafe.daum.net/nbclove/천주교녹번동성당 카페) 유배 생활 38년째인 1838년 2월 1일 병환으로 숨을 거뒀는데 김석구의 아들 김상집의 배려로 김씨 선산에 묻힐 수 있었다. 김상집은 추자도에 있는 황경한에게도 모친의 부고(부고 편지가 현존한다)를 알리고 ‘한굴밭’에 있는 후손들에게 정 마리아의 묘를 돌봐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겨 그 유언에 따라 그 후손들이 묘를 정성껏 돌보고 있다.(제민일보 4327년 6월18일 및 4327년 9월 26일, 천주교녹번동성당 카페)
비록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 삶 전체가 순교자의 생애를 방불케 하는 굳건한 신앙의 증거로 가득했기에 후손들은 그를 무혈의 순교자, 즉 증거자의 반열에 올리고 있다. 1994년 9월 5일 순교자 현양 대회 강론에서 김창렬 주교는 이렇게 말했다.
“신앙의 탓으로 이 고장에 유배된 유일한 증거자인 정 마리아 난주님을 순교자라고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 놀라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보편교회도 피 흘려 순교하지 않은 이들 중에서 어떤 분들은 순교자로 공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천주교녹번동성당 카페)
정난주의 무덤은 1970년대 초에 발견돼 1990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천주교 대정성지 성역화 사업을 펼쳐 지난 1994년 새 단장됐다.(제민일보 4343년 11월 20일)

《작성 041024, 수정보완 1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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