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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환동 막숙 02-26 | VIEW : 4,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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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법환동 286번지 법환 포구 일대
시대 ; 고려

1271년 김통정 장군이 이끌고 본도에 들어온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의해 평정된 후 본도에는 원나라의 직영 목마장이 설치되고 이 목마장을 관리하는 몽고인 목호(牧胡)들이 주재하게 되었다. 이들 목호들은 원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계속 주재하면서 관민을 괴롭히므로 고려 조정에서는 여러 차례 이들을 토벌하려 했으나 그 때마다 관군이 그들에게 패전하곤 했다. 이들은 심지어 조정에서 보낸 관리를 살해하는 등 그 횡포가 심하였다. 이를 '목호의 난'이라 한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공민왕23년(1374)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들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최영 장군이 전함 314척과 군사 25000여 명을 이끌고 명월포로 상륙하자 목호의 우두머리인 석질리는 기마병 3000명을 이끌고 기마전에 유리하도록 고려 군사를 넓은 평야 지대로 유인하려 하였다. 이에 최영 장군은 그 작전을 알아차리고 목호들을 추격하여 강정들에서 접전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강정들에서 완패한 석질리는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범섬으로 도망갔다. 최영 장군은 전부령 정용을 먼저 보내어 범섬을 포위케 하고 자신은 정예병들을 뽑아 범섬을 공격하여 몽고인들을 완전 소탕하였다.(제주도, 제주도의 문화유산 115쪽)

사건은 원나라의 쇠퇴와 고려 공민왕의 반원 자주정책에서부터 시작된다. 공민왕은 원나라에게 빼앗겼던 동녕부, 쌍성총관부의 회복과 함께 제주에서도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영토를 회복하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목호의 저항은 만만치 않았다. 공민왕의 반원정책이 시작된 공민왕 5년(1356년) 처음 반기를 들어 고려에서 파견한 도순문사 윤시우를 죽이더니 이후에도 다시 세 차례에 걸쳐 고려 관리를 죽이곤 하였다. 1366년에는 100척의 배가 파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목호들에게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삼별초 진압 당시 160척이 동원되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목호의 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 하다. 특히 세 번째 반란은 원나라가 실질적으로 망한 지 1년이 지난 1369년에 일어나 것이라, 제주도 목호의 자체 힘만 해도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건 명나라의 개입과 말(馬) 때문이었다. 공민왕 23년(1374년) 명이 탐라에 있는 원나라의 말 2,000필을 고려에 요구하자, 이를 집행하려던 고려 관리에게 제주의 목호들이 저항하면서 시작되었다. 제주의 목호들은 원나라의 원수인 명에게는 결코 말을 줄 수 없다고 버티면서 단지 300필만을 내어주었다.

이에 공민왕은 제주 공략을 결정하고 전함 314척, 정예병 25,605명을 최영에게 주며 본격적인 목호 토벌을 명령하였다. 이후 명나라를 치러 가던 요동 정벌군 38,830만과 견주어 본다면 이 때 목호 토벌을 위해 동원된 군대의 규모가 어떠했는지는 짐작하고도 남겠다. 그리고 여기에는 원의 직속령이었던 탐라를 직접 지배하려던 명나라의 의도를 사전에 차단할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규모 병력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 공략이 쉽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7월 26일 출발한 최영의 군대가 제주의 명월포에 상륙한 것은 8월 28일의 일이었는데 처음 해안에 도착한 11척의 군인들은 모두 목호들에게 살해될 정도였다. 이는 목호들도 3,000 기병을 거느리고 최영의 군대가 들어오는 명월포에서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명월포는 이전에 삼별초 별장 이문경이 상륙했던 곳이며, 또 삼별초를 토벌하러 오던 여몽연합군의 좌군이 상륙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전투는 제주도 서쪽 명월에서 시작하여 어음리, 밝은오름, 금악, 새별오름, 서귀포시 예래동, 서귀포시 서홍동에 이르기까지 며칠 몇 날에 걸쳐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막바지에 몰린 목호의 수뇌부는 서귀포 앞 범섬에서 최후를 맞았다.

목호가 서귀포 앞 범섬 쪽에 최후의 저항선을 구축한 것은 아마도 제주도 남서부 지방이 당시 그들의 주된 근거지였기 때문인 것 같다. 원나라에 의해 화려하게 중창된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가 구심점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법화사는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280명의 노비를 거느릴 정도로 거대 사찰이었다.

전투기간은 어느 정도였을까? 토벌군이 처음 상륙한 게 8월 22일이며 정벌을 끝내고 최영이 제주를 떠난 것이 9월 22일이고 보면 거의 한 달에 걸쳐 진행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단 사흘만에 끝난 삼별초 전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병력 규모 면에서 삼별초 전투와 비교할 때는 겨우 두 배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호의 난이 삼별초 전투보다 훨씬 오랫동안 진행되었던 건 어떤 연유에서일까? 무엇보다 삼별초와 목호의 주둔 기간을 비교해 보면 그 답이 나올 것 같다. 삼별초는 2년을 조금 넘는 기간, 그리고 목호는 약 100년 동안을 주둔했었다. 100년 동안 함께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점은 목호 세력이 가진 '저항의 지지기반'을 말해준다. 몽골의 젊은 군사가 제주도에 100년 동안 있었다면 어떤 현상이 일어났겠는가? 기록에서는 1,400명, 혹은 1,700명 정도의 몽골 군인들이 제주도에 들어와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과 탐라 여자들 사이에 자손들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 아닐까?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신증동국여지승람} 열녀 조에 등장하는 탐라의 정(鄭)씨 여자를 들 수 있다. 그녀는 목호와 결혼했는데 그만 그녀의 남편은 '목호의 난' 와중에 전사해 버렸다. 이 때 그녀의 미모를 탐낸 진압군 고려병사가 그녀에게 결혼을 강요했는데 그녀는 이를 끝까지 물리치고 수절했다고 한다.

최영의 정예군대 25,605명은 어떤 근거로 편성되었을까? 아마도 토벌 대상인 목호의 수를 고려한 게 아닐까? 아마 양측이 서로 비슷한 숫자라고 가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몽골 출신의 오리지널 목호 수는 그만큼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대다수는 원의 100년 지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섞인 탐라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탐라인 곡겁대, 몽고대, 탑사발도 등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분명 앞의 인명은 순수한 탐라인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달 가까이 진행된 그 전투는 고려와 목호 사이의 총력전이었다. 그런 만큼 희생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의 전투 목격담을 듣고 '하담'이라는 사람이 남긴 글에는 "우리 동족이 아닌 것이 섞여 갑인(甲寅)의 변을 불러들였다.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 말하면 목이 메인다"라는 표현이 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우리 동족 아닌 것이 섞여'라는 표현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참혹한 전투가 우리 동족 내에도 진행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게다가 '칼과 방패가 바다를 뒤덮고 간과 뇌는 땅을 가렸으니'라는 표현은 그 처참함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해준다.(jejuhistory.com 이영권의 제주역사이야기 참조)

이 사건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목호의 난 때에 제주도민들(탐라국 백성들)의 입장은 과연 누구의 편이었을까 하는 것이다. 제주도민들이 목호들에게 협조적이었던 것이 아닐까? 최영이 정병 25,600을 이끌고 제주 목호 토벌에 나서겠다고 했을 때 왕은 이를 반대했었다고 한다. 정병 25,600이 도성을 비우고 바다 건너 제주까지 간다는 것은 외침이 있을 때는 나라를 통째로 바친다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목호 3,000을 토벌하기 위해서 그 여덟 배나 되는 정병을 이끌고 와야 했던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을 것이고 그 까닭은 제주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제주는 공식적으로는 서기1105년에 고려의 일개 현으로 복속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고려 조정의 통치를 받은 것은 그 후 상당 기간이 지나서였을 것이다. 고려사에도 현령을 파견한 것은 100여년쯤 뒤에 기록되고 있다. 제주에서 민란이 일어나는 것도 탐라왕국 시대에는 없던 것이 1200년대 후반에서야 나타나고 있다. 삼별초의 이문경과 고려관군 김수·고여림이 전투를 벌일 때도 삼별초에 쫓긴 고여림이 대촌성(제주성) 문을 열어 줄 것을 성주에게 요구했으나 성주 고인단은 탐라 백성들이 전란에 휘말리는 것을 염려하여 열어 주지 않았다. 고려 조정과 군신관계가 확립되어 있었다면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반역 행위를 고인단은 실행한 것이고, 그 일로 인하여 고인단이 조정으로부터 처벌을 받았다는 기록도 찾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탐라인들이 처음부터 고려 조정에 대하여 반발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탐라인들은 고려 관헌들보다 목호들과 더 친하게 지내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막숙은 천연적인 양항(良港)으로 병선을 안전하게 대었고 이 일대를 중심으로 군사들이 주둔(야영)한 데서 붙은 이름이다.(제민일보 1994년 3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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