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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2동 관덕정 10-06 | VIEW : 8,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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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사항 ; 대한민국 보물 제322호(1963년 2월 7일 지정)
위치 ; 제주시 관덕로19(삼도2동 983-1)
건축년대 ; 세종30년(1448)
유형 ; 관방유적

관덕정은 조선 시대의 관아 건물의 하나로 관덕당(觀德堂)이라고도 불렀다. 관덕(觀德)이란 이름은 예기(禮記) 제46권 사의(射義)편에 나오는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활을 쏜다는 것은 성덕을 보는 방법인 것이다)'라는 글귀에서 따온 것으로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관덕정이라는 이름 자체는 이미 고려시대에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조선 시대에 처음으로 지방의 관아마다 활쏘기가 포함된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세워지면서 관덕정이라고 하면 으레 조선시대의 것을 가리키게 되었다. 하지만 지방 관아에 설치된 관덕정의 경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관아 건물들과 함께 헐려 나갔다. 건물 자체가 온존하는 것은 제주도에 있는 관덕정이 유일하며, 관덕정이라는 건물도 제주에 있는 것이 가장 유명하다.(나무위키) 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현재에는 관덕정이라는 이름이 으레 활터에 붙는 이름으로 쓰이며,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 관덕정(관덕당이라고도 부름) 등 다른 지역에도 관덕정이 있고, 창경궁에도 왕이 활을 쏘던 관덕정이라는 이름의 건물이 남아 있다.(나무위키)

제주시 삼도2동의 관덕정은 제주도에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옛 건물로서 세종30년(1448) 안무사겸목사 신숙청(辛淑晴)이 군사들의 훈련청으로 창건하였다.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安平大君)에게 제액(題額)을 받았다. 당시 한성부판윤을 지내던 제주 출신 고득종이 안평대군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대문장가인 신석조(영산신씨 상장군공파14세)에게 「관덕정기(觀德亭記)」를 짓게 하였다. 신석조는 문종2년(1452)에는 『세종실록』을 시찬(始撰)하였으며, 세조2년(1456) 공조참판 때에는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한 사람이다. 관덕정기는 현존하지 않는다.
관덕정의 편액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손실되어 현재의 글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작품인 것으로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남사록(南槎錄)」에 의해 밝혀졌다.
천정 보와 보 사이에 걸려 있는 耽羅形勝(탐라형승=탐라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란 큰 글자는 정조4년(1780) 김영수 목사가 쓴 글씨이다. 또, 안쪽에는 고종19년(1882)에 목사 박선양이 쓴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처음에는 3칸 건물이었지만, 이후 여러 번 중수와 개축 과정을 거쳐 지금과 같은 규모로 바뀌었다. 건축 면적은 224.8㎡로 구조는 이중기단 위에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에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 겹처마지붕, 28개의 민흘림기둥으로 떠받쳐진 단층 목조 건축물이다. 또한 이익공(二翼工) 집으로서 처마가 길었던 것이 특징이며 사방은 개방한 정자양식이다. 관덕정 건물이 앉아 있는 방향은 동쪽이다. 현존하는 건물의 원래의 건축 수법은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한다.
성종11년(1480) 목사 양찬이 중수, 숙종16년(1690)에 목사 이우한이 중수, 영조29년(1753)에는 목사 김몽규가 중수, 정조원년(1778)에는 목사 황최언이 중수, 순조33년(1833)에는 목사 한응호가 중수, 철종원년(1849)에는 목사 이현공이 중수하였다.
1900년초까지만 해도 좌우의 처마를 받치는 첨주가 있었다. 구한말(1890년대)에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사진 속에 그 모습이 나오는데 관리하지 않아서 퇴락한 모습이 을씨년스럽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에는 일본인 도사(島司) 전전선차(前田善次)에 의해 보수됐는데, 관덕정의 처마가 2척이나 짧아지고 문이 달려 정자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처마 훼손의 이유는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이란 설이 있는가 하면 당시 도시계획선에 저촉돼 잘렸다는 설도 있다. 그 후 1930년대, 1950년대의 사진도 남아 있다. 1969년에 보수하여 현재에 이르는데 1990년대에 와서도 작은 보수를 한 적이 있다.
들보 양면에는 작자 미상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모두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한 것이 안타깝지만 격조높은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는데 내용을 보면 〔醉過楊州橘滿軒〕〔商山四皓〕〔赤壁大捷圖〕〔大狩獵圖〕〔陣中西城彈琴圖〕〔鴻門宴〕〔十長生圖〕이다. 지금은 그림이 퇴색하여 전혀 알아볼 수 없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모조품이 걸려 있다.
관덕정은 수백 년간 제주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했다. 관덕정 앞마당은 창건 당시부터 연무장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활쏘기 시합을 하게 되면 목사와 판관 등이 이 정자에 좌정하여 시합 상황을 지켜보곤 하였다. 또한 관민이 서로 더불어 의논할 일이 있거나 큰 잔치를 베풀 때에도 이곳에서 하였다.
인조원년(1623)년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인조15년(1637) 제주에 이배되어 4년4개월의 제주유배생활 끝에 인조19년(1641) 서거한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의 빈소를 마련하여 백성이 모인 가운데 대제가 치러졌던 곳이기도 하다.
숙종2년(1702)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제주사회(濟州射會)에는 목사와 판관, 현감 등이 정자에 앉아 관덕정 앞 활쏘기 대회 상황을 지켜보는 모습이 나타나 있고, 과거시험인 승보시도 열렸다. 승보시는 원래 성균관 유생을 상대로 치러진 소과(小科)의 초시(初試)에 해당하는 시험인데 지방에서는 제주·개성·수원에서 시행됐다.
1901년에는 신축교란의 장두 이재수가 이곳에서 교인들 316명(제주신보160718)을 처형하기도 했으며, 일제시대에는 관덕정 광장의 남쪽으로는 식산은행(현 국민상호신용금고 자리), 북쪽으로는 도청(島聽)·경찰서·소방서·우편국(현 제주체신청 자리), 그리고 서쪽으로는 제주읍사무소(구 시청 자리) 등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1922년에는 제주기독청년회 주최 자선음악연주회를 열었고, 일제 말기에는 5일장터로도 이용하였다.
1947년에는 3·1절 기념 행사와 관련하여 관덕정 앞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부녀자를 포함한 시민 6명이 현장에서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4·3사건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1949년(4월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를 방문하였을 때 관덕정에서 환영대회를 했으며, 같은 해 6월8일에는 군경과의 교전중 사망한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을 십자가(十字架) 형틀에 묶어 세워 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지은 도청 건물이 1949년 방화로 소실되자 사면을 판자로 막고 창문을 달아 임시 도청 청사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1952년에는 도의회 의사당, 북제주군청 임시청사(1946년 8월 1일)에 이어 미국 문화공보원으로 이용하기도 했다.(제주新보160718) 1950~1970년대에는 정부 주도로 학생 및 시민들이 모이는 군중 집회들이 이곳에서 열렸고, 1990년대에는 대학생과 시민단체 등이 정부 시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열기도 하였으며, 2001년부터는 관덕정 앞에서 탐라입춘굿놀이 행사를 치름으로써 문화의 공연장으로 성격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와 같이 관덕정 앞 광장은 지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도민과 살아 숨쉬어 왔고 우리의 정신이 숨겨진 곳이라 하겠다.

1959년 문교부에 의해 국보 제478호로 지정되었다가 1963년 국보에서 보물 제322호로 재지정되었다. 관덕정 앞에는 1961년 재일동포들이 고향 발전을 기원하며 기증한 원형 분수대가 설치되었고 분수 주변에 종려나무를 심었었으나, 1999년 7월에는 제주목 관아 복원 공사로 분수대가 헐렸다.
2003년 12월 문화재청은 27억원을 들여 관덕정 처마를 복구하는 전면적인 보수공사에 나서 2006년 8월에 완료했다. 현재 관덕정은 처마가 원래 길이인 15척으로 복원되고 정자의 모습도 회복한 상태다. 단순히 관덕정 외형의 복구를 넘어 일제 강점으로 상처받았던 제주도민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옛 건물을 이루던 목재와 기와 등 부재는 제주목 관아에 보관돼 있다. 2005년 보수공사를 위하여 관덕정을 해체한 상태에서 관람을 허용한 적이 있다. 위 사진은 당시 내부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최근에는 새들의 배설물 오염을 막기 위해 천장을 따라 그물을 쳐 놓았다.

관덕정 창건과 관련해서는 한 사람의 억울한 희생이 담겨졌다고 전해져 온다. 현용준의 제주도 전설에 따르면 관덕정을 세우라는 조선 세종의 어명이 떨어지자 전국 각지에서 내노라하는 목수들이 모두 제주에 몰렸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자를 다 지으면 쓰러지고 , 또 지으면 쓰러졌다고 한다. 건축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은 불허하는 목수들이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이번만은 쓰러지지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더욱 치밀하게 정자를 세우는데 만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목수들은 비지땀을 흘리며 공사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한 중이 그 옆을 지나가다 쓰고 있던 삿갓을 벗으며 “또 쓰러지겠는 걸…” 하고 중얼거리는 게 아닌가? 그 소리를 들은 목수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고 “뭣을 안다고 불길한 소리를” 하느냐며 야단을 치자 중은 말없이 삿갓을 덮어쓰고 가던 길을 가 버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정자가 다시 완공됐지만 중의 말대로 또 다시 쓰러져 버린다.
그때서야 목수들은 얼마 전 만난 중이 뱉은 말에 이유가 있음을 깨닫고 가르침을 받기 위해 중을 찾아 나선다. 그러기를 한 달 결국 중을 찾게 된 목수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사과하고 정자가 쓰러지지 않을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애원한다.
그제야 중은 다물었던 입을 열며 말하기를 “일반 집을 짓는 것처럼 닭이나 돼지로 상량식을 하면 안 되고 인상량식(人上梁式) 즉, 사람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된다고 말한다.
깜짝 놀란 목수들은 어떻게 사람을 희생하느냐며 반문하는데 중은 태연하게 어려울 게 없다며 아무 달 며칠에 상량식을 준비해 큰소리로 “상량이오”를 외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말한다. 중의 말을 들은 목수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중이 가르쳐준 날짜에 상량식을 갖기로 한다. 이윽고 상량식 날이 되었다.
임금의 어명으로 지어진 정자를 보기위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 중에는 큰 솥을 머리에 이고 있는 솥 장수도 끼어 있었다. 준비를 마친 목수들은 중이 가르쳐준 대로 힘을 주어 목청껏 “상량이오”를 외쳤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찌나 소리가 컸던지 솥 장수가 깜짝 놀라 머리에 이고 있던 솥을 떨어뜨리며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 솥과 부딪혀 목숨을 잃게 된다. 결국 중의 말대로 관덕정의 상량제물은 ‘닭과 돼지가 아닌 사람’이 되었고 관덕정은 다시 쓰러지지 않고 무사히 완공됐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제주시 용당1동에 사는 홍순흠과 박용하가 구연한 것을 채록하여 1985년에 출판한 『제주도 전설지』에 실린 것이다.

《작성 041006, 보완 140228, 16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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