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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산리 베락당 04-04 | VIEW :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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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조천읍 와산리 694-1번지
시대 : 조선
유형 ; 민속신앙 성소
와산리는 1600년 경에 설촌한 것으로 전해진다. 설촌 당시에 당을 설치했다면 이 당의 내력은 400년쯤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베락은 벼락의 제주어이다. 베락당에 모셔진 신은 베락ᄉᆞ제이다. 즉, 벼락장군을 모신 당이다. 불돗당을 웃당이라고 하고 베락당은 알당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동북쪽에 있어 불돗당보다는 아래쪽에 있기 때문이다. 2017년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설홀 유례선 송씨가 먼저 읍촌을 하여 설촌하면서 송씨베락당이라고도 하였다’는 설명이 있는데, 설홀 유례선이 무엇인지, 읍촌을 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제일은 3월 13일이며, 제물로 돼지고기를 사용한다. 본향신이므로 생산, 물고, 호적, 장적을 관장하였다. 원래 눈미마을 본향이었지만 지금은 주민들이 불돗당에만 다니기 때문에 기능을 잃어 폐당되었다. 그래도 불돗당에서 당굿을 벌이는 음력 3월 13일에는 본향당신인 베락ᄉᆞ제도 함께 모셔 제향을 바친다. 베락당에 전해오는 이야기(본풀이)는 다음과 같다.
〈옛날에 와산리 검은땅밭에서 송씨할머니가 큰딸과 밭에서 검질을 매고 있었다. 귀가 가려워진 송씨할망은 딸에게 귓밥을 파 달라고 했다. 딸은 나뭇가지를 꺾어 귓밥을 파다가 실수로 귀청을 건드리고 말았다. 화가 난 송씨할망은 딸에게 ‘베락 맞을 년’이라고 욕을 했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화덕벼락장군이 그 소리를 듣고 딸에게 벼락을 쳐 버렸다. 자신의 말 때문에 딸이 벼락을 맞아 죽자 송씨할망은 두이레 동안 통곡을 했다. 애끓는 울음소리를들은 옥황상제가 땅을 내려다보니 화덕벼락장군의 실수로 죽은 사람이 보였다. 옥황상제는 화덕벼락장군에게서 벼락몽둥이와 벼락틀을 빼앗아버렸다. 이 때문에 화덕벼락장군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인간세상에 살게 되었는데 화덕벼락장군이 가는 곳마다 불길이 따라다녀서 사방에 불이 났다. 마을에 계속 불이 나자 마을 사람들은 불칸밭(불탄 밭)이라는 곳에 제단을 마련하여 화덕벼락장군을 모셨다.〉
문차일드의 자료에는 베락장군이 몽니로 마을마다 불을 내며 다녔기 때문에 베락장군을 본향신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그 후에는 불이 나지 않았다고 하며, 처음에는 불도할망과 같이 모셨으나 불도할망이 마을 주민에게 현몽하여 ‘끄렁내(그을음 냄새)가 나서 샅이 못 살겠다’고 해서 마을 아래쪽으로 옮겼는데 일제강점기 미신탄압 시기에 폐당되어 다시 불돗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신목은 폭낭(팽나무)이다. 이 나무는 옆으로 길게 뻗은 판근(板根) 줄기와 뿌리가 맞닿는 부분이 둥근 형태를 띠지 않고 수직으로 편평하게 발육하여 판상이 되어 지표에 노출된 형태를 갖는 뿌리를 말한다. 습지에서 나무가 자신의 몸을 지탱하거나 습지가 아니라도 바람 등에 버티기 위해서 형성되기 때문에 얕은 땅 속을 횡주(橫走)하는 뿌리의 배면(背面)이 극도로 기울어서 비대해진 결과이며, 계속 줄기의 기부가 특정한 방향으로 기울면서 비대해진다. 아열대나 열대의 숲에서 자라는 거목. 큰 나무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 매우 발달했고, 뿌리가 엄청나게 옆으로 퍼져 있으며 수형이 웅장하다. 송악이 폭낭을 타고 올라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서 겨울에도 잎이 떨어지지 않는 늘푸른나무처럼 보였었다. 당에는 울타리를 두르거나 제단을 만들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였는데 2017년 2월 폭낭 주변 잡목을 깨끗이 정리하고 돌담 울타리도 둘렀다. 2020년 4월에 보니 가운데 부분에 큰 가지 몇 개가 고사하였다.
《작성 2020-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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